래디컬 페미니즘 - 성별 계급제를 꿰뚫는 시선 열다 페미니즘 총서 1
쉴라 제프리스 지음, 김예나 옮김 / 열다북스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영국의 페미니스트, 여성운동가다. 그녀는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의 저서 《성 정치학》(이후, 2009)을 읽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처음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활동했으나 ‘남성의 여성 억압’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1977년에 그녀는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했으며 1980년대 초반부터 레즈비언 페미니즘 운동에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의 성적 폭력을 비판한 그녀는 성매매와 포르노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래디컬 페미니즘》(열다북스, 2018)은 제프리스의 책들에 수록된 글을 모은 책이다. ‘선집’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의 이론적 기반이 충실히 반영된 그녀의 입장은 이 책에서 체계화되고 있다. 그 핵심은 여성 억압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성 산업은 여성에 대한 신체적 · 정서적 폭력, 착취를 부추긴다. 즉 성매매는 ‘합법적인 성 노동’이 아닌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자 성적착취가 이루어지는 남성 중심적 산업이다. 제프리스는 여성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지를 현장에서 듣고 있다. 여성 문제를 인권 문제로 제기하는 그녀의 활동은 여성 억압에 맞선 여성운동에 필요한 담론 기반을 마련했다. 따라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첫 번째 글(원치 않는 남성들에 의한 모든 접촉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여성들의 저항, 1880-1914)은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진행된 영국 여성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정화 운동’을 주도하여 남성 폭력, 여성 차별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사회 정화 운동가들은 여성과 소녀들을 억압하는 성매매를 비난했고, 남성이 스스로 순결을 유지하는 자기 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온건적인 사회 정화 운동의 한계를 느낀 페미니스트들은 서프러제트(Suffragette) 운동에 합류하여 여성의 투표권 확보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서프러제트 운동에 참여한 페미니스트들은 투표권을 확보한다면 성매매를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Christabel Pankhurst)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로 설정하는 남성 섹슈얼리티의 해악을 비판했고, 서프러제트가 선택한 투쟁 방식은 남성과의 결혼을 거부하여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프러제트의 집단적 투쟁은 금욕주의를 비판하고 성적 쾌락을 누리는 자유를 강조하는 섹스 개혁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1920년대에 들어 섹스 개혁주의자들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남성 혐오자’, ‘불감증 있는 독신 여성’ 등으로 비하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래디컬 페미니즘의 기세가 주춤했다.

 

 

 

 

 

 

3장(장애와 남성의 섹스 권리), 4장(성산업과 비즈니스 관행 : 여성 평등의 방해물), 5장(성매매, 인신매매, 그리고 여성주의 : 그 논쟁의 근황)은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과도 일맥상통한다. 밀렛과 그녀의 영향을 받은 제프리스는 남성 섹슈얼리티가 작동된 성 권력이 다른 사회 · 정치적 권력관계를 관통한다고 인식한다. 제프리스는 장애 남성의 성적 권리를 옹호하는 사회단체의 주장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녀는 장애 남성을 위한 성매매도 장애 여성을 억압하는 성 착취라고 주장한다. 성매매 산업은 남성 중심적 직장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매매가 합법화된 호주에서는 사업주에게 홍보하는 성매매 업소를 볼 수 있고, 독일에서는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성매매 여성을 공급하기도 한다. 성매매를 허용하는 남성 중심적 관행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새로운 유리 천장’이 된다. 3, 4, 5장은 왜곡된 성문화를 조장하고, 여성 평등을 방해하는 성매매 산업의 문제점을 낱낱이 밝혀낸 글이다.

 

6장(트랜스젠더 운동 :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7장(2004년 영국의 성별인정법 분석), 8장(화장실의 정치학 : 여성 공간을 ‘성중립화’시키는 운동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대응), 10장(10장 레즈비언의 기이한 실종 : 학계에서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트랜스섹슈얼을 강조하는 퀴어 이론을 비판하는 글들이다. 제프리스는 트랜스섹슈얼이 여성의 권리를 지키는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레즈비언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녀는 유동적 정체성을 내세워 젠더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 트랜스젠더 수술을 지지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그리고 ‘성 중립 화장실’ 정책을 지지하는 주디스 핼버스탬(잭 핼버스탬, J. Halberstam)을 비판한다. 이 세 사람은 퀴어 이론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들이다. 제프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수행하려고 전념하는 MTF트랜스젠더들은 젠더 이분법을 고수한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은 성전환 수술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제프리스는 공공 화장실의 성별 구분을 없애는 정책에 반대한다. 남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경험이 있는 MTF트랜스젠더, 여성의 옷을 즐겨 입은 채 ‘여성’으로 살아가는 남성 크로스드레서 등이 성 중립 화장실에 출입하는 것은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제프리스는 성 권력의 불평등한 구조를 형성하는 남성 섹슈얼리티를 분석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페미니즘에서 포착되지 않던 억압의 현상을 가시화하고 있다. 트랜스섹슈얼을 비판하는 그녀의 입장은 퀴어 이론 안에서 ‘본질주의’ 또는 ‘문화 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 물론, 이 단어가 좋은 의미로 붙여진 것은 아니다. 퀴어 이론과 래디컬 페미니즘을 서로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양쪽 진영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대척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젠더’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퀴어 이론-래디컬 페미니즘 논쟁은 대단히 복잡하다. 그러나 래디컬 페미니즘과 성 소수자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동시에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하면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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