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여자가 만든 치즈를 먹고 나서 배탈이 났다. 저 여자는 치즈에 사람을 해치는 마술을 부렸다. 저 여자는 분명 사악한 마녀다.”
이것은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치즈를 만든 여성을 마녀로 고발한 사람의 증언이다. 마녀로 고발된 여성이 마녀재판에 회부되면 무조건 죽게 된다. 고발 진술을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무고한 여성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유죄 판결을 받는다. 15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수만 명 목숨을 앗아간 마녀사냥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인들은 마녀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악마를 섬기는 대가로 마력을 받아 인간 사회에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마녀사냥은 종교적인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자행되었다.
* [절판] 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소나무, 2003)
* [품절] 카를로 진즈부르그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길, 2004)
* 쥘 미슐레 《마녀》 (봄아필, 2012)
사람들은 두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을 해소하는 전략을 마련한다. 괜히 소리를 지르거나 무작정 폭력을 행사한다. 만일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면 우선 당면한 사태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또는 원인)이 파악되지 않고, 이 두려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할지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때 흔히 나타나는 불안 해소 전략이 희생양(scapegoat)을 만드는 법이다. 공포를 분노로 바꿔 희생양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공포의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내부 결속을 위해 희생양은 우선 밖에서 찾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내부에서라도 만들어 낸다. 마녀사냥 광풍은 바로 ‘희생양 만들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럽의 마녀사냥》(소나무, 2003)은 마녀사냥 광풍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발단 원인을 지배층(권력자, 성직자, 지식인 등)의 집단적 불안에서 찾는다. 유럽 근대 세계의 탄생은 미래에 대한 불안도 동시에 증폭시켰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성서가 종교적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라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기독교 세계를 크게 분열시켰다. 그 결과 근 천 년 이상 교회가 누려오던 절대적인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도 마녀사냥은 줄어들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근거로 악마의 존재를 규정했으며 개신교의 악마론은 마녀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따라서 종교개혁도 마녀사냥 확산에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유럽 국가의 특징은 국가 권력의 중앙 집권화이다. 그렇지만 근대 초기의 유럽 국가는 어느 정도 지방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지방 권력은 마녀재판을 진행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사법제도에도 일정 부분 변화를 가져왔다.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 16세기에 교황의 권위가 축소되면서 마녀재판을 주도한 교회 법원의 사법권이 지방 세속 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지방 관리가 마녀 혐의자를 심문하여 처벌을 내릴 수 있었다.
《유럽의 마녀사냥》을 쓴 브라이언 P. 르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이 마녀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믿음을 뒷받침한 지적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봉한 지식인들은 마녀가 악마의 도움을 받아 흑마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 스콜라 철학에 도전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이 등장했다. 신플라톤주의자는 인간 스스로 우주의 기운을 받으면 마술을 부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유럽 지식층의 주류 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했고 스콜라 철학에 익숙한 기득권층의 태도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학문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마녀와 흑마술에 대한 믿음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하였다.
쥘 미슐레는 마녀가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는 지배계층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르박은 미슐레의 해석을 ‘낭만적인 해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마녀를 기존의 사회 체제에 거부하는 반동 세력으로 보는 해석을 비판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마녀들이 사회를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마녀 집회에 모인다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탈리아 지방의 농민들이 이단 심문을 받은 기록들을 토대로 마녀사냥을 분석한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자신의 책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길, 2004) 서문에서 미슐레의 마녀 연구를 언급한다. 그러나 진즈부르그도 마녀를 해석한 미슐레의 관점을 ‘반역적 마녀에 대한 낭만주의적 찬미’라고 평가한다.
진즈부르그는 ‘밤의 전투’로 알려진 베난단티(Benandanti) 비밀 모임이 어떻게 ‘마녀 집회(sabbath)’로 알려지게 되었는지 추적한다. 베난단티는 흉년을 부르는 마녀들에 대항하는 신성한 존재였다. 농민들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각각 베난단티와 마녀로 연기하면서 서로 싸움을 벌이는 행사를 갖는다. 농민들은 베난단티가 승리한 그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미신을 믿었다. 베난단티 역할을 맡은 농민은 자신이 영적인 힘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말한다.
저는 베난단티입니다. 왜냐하면 일 년에 네 번 사계재일 때 밤마다 싸우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만 가고 육체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들기 위해 나가며, 마녀들은 악마를 받듭니다. 우리는 서로 싸웁니다. 우리는 회향단으로 싸우고 그들은 수숫대로 싸웁니다.
(베난단티 역할을 맡은 바티스타 모두코의 진술, 진즈부르그의 책 51쪽)
베난단티 모임에 참석한 농민들의 증언을 확인한 이단 심문관들은 ‘풍요제’를 ‘악마를 숭배하는 마녀 집회’로 규정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영적인 체험에 고백한 농민의 진술은 베난단티 모임을 불리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농민들의 진술을 통해서 베난단티의 이단적 성격을 찾아내려고 했다. 결국, 농민들의 민중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이단 심문관들은 농민들의 의식이 반영된 연례행사를 탄압했다. 진즈부르그는 마녀 사냥 광풍 속에 왜곡되고 잊힌 베난단티 모임의 실체를 복원하여 지배계층에 억압받는 민중 문화에 주목한다.
하지만 진즈부르그의 해석도 르박의 시선에서 비켜갈 수 없다. 르박은 환상적인 요소가 강한 베난단티 역할자의 진술만 가지고는 베난단티 모임이 실제로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진즈부르그의 해석도 미슐레의 낭만적인 해석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그치게 된다.
르박과 진즈부르그의 마녀 연구는 “누가 마녀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이 얻은 결론은 비슷하다. 민중이 마녀를 만들지 않았다. 지배계층이 마녀를 만들었고, 민중은 지배계층이 운영하는 이단 심문소가 남긴 기록(마녀로 고소한 사람들의 증언, 마녀 혐의를 받은 사람들의 진술)을 확인하면서 마녀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녀가 존재하기 전에 마녀를 규정하는 논리들이 먼저 만들어졌다. 마녀를 규정하는 논리는 마녀가 아닌 시대적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동원된 희생양들만 양산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명언을 빌리자면 ‘마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럽의 마녀사냥은 한 사회가 비가시적인 특정 대상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사회가 빚어내는 비인간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