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부산물이다 - 문명의 시원을 둘러싼 해묵은 관점을 변화시킬 경이로운 발상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 378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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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전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카(Edward H. Carr)‘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정의를 내리면서 ‘과거를 해석하면 미래를 통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란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시간, 즉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다. 이러한 과거에 인간이 한 일과 생각을 밝히는 것이 역사다. 역사는 인과관계라는 시간의 실타래로 엉켜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원인’을 알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 단일한 원인만을 갖는 것은 아니며, 여럿인 경우가 많다. 역사가는 이것들을 파악해 내고, 단순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한 후 역사적 사건 속의 상호관계를 파악한다. 이것이 역사가의 해석이다. ‘원인(들)’을 탐구하면서 역사적 사건들을 인과의 계열 속에 배열하는 것이 역사가 고유의 기능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을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다. 그들은 문명화되는 과정이 역사의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고, 문명이 번영으로 가는 길을 상승하는 계단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단일한 경로로 간주하곤 했다. 이러한 필연성의 근저에는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원인이 있으며 같은 원인은 같은 결과를 이끈다는 믿음이 가정되어 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카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2015)만큼 가장 많이 읽힌 역사책도 찾기 어렵다. 카가 이 책에서 보여준 역사적 필연성, 진보에 대한 확신, 그리고 역사를 주도해 나가는 인간의 주체성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학생들의 세계관에 부합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성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90년대 들어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역사에 단일한 지향점과 목적이 있고, 역사적 진보를 논증할 수 있다는 믿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문명의 발전이 지극히 우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중국의 사회학자 정예푸(鄭也夫)는 필연성을 찾으려는 문명사 연구에 비판적이다. 그가 쓴 《문명은 부산물이다》(37∞, 2018)는 문명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명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

 

정예푸는 문명 발전에 기여한 여섯 가지 핵심 요인족외혼, 농업, 문자, 종이, 조판인쇄, 활자 인쇄 등이 역사의 필연인지, 우연인지를 분석한다. 이러한 여섯 가지 요인들은 인류가 필요해서 만들어진 산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져서 생긴 산물이다.

 

원시 인류 사회까지만 해도 같은 부족 안의 근친상간이 대부분이었다. 부부의 개념도 없었다. 이후 부족들 간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족내혼이 일반화됐다. 인류학자들은 부족사회 안에서 근친상간 금기가 형성되어 족외혼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예푸는 족외혼이 종족 퇴화를 막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는 영국의 인류학자 웨스터마크(Westermarck)의 가설을 지지하면서 족외혼을 ‘외부에 대한 성적 취향’의 산물로 봤다. 웨스터마크는 같이 생활한 성장한 이성, 즉 가족 구성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족외혼이 보편화하였다고 주장했다.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인류는 야생 벼를 우연히 발견하여 그것을 땅에 심었다. 그들은 야생 벼를 수확하는 법을 습득했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해지는 비수확기는 이제 막 농업을 하기 시작한 인류가 겪는 시련이었다. 그것은 ‘농경사회’를 이룩하게 될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한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던 터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농업을 선택했다.

 

문자의 발명과 종이의 탄생은 학문 발전과 지식 전달 수단으로, 인류의 문화 발달과 문화 형성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정예푸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에 주목하여 조판인쇄가 발달한 과정을 추적한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점토판에 도장을 찍는 관습이 있었다. 종이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종이에도 도장을 찍었다. 종이에 도장을 찍는 행위는 조판인쇄의 기원인 셈이다.

 

《문명은 부산물이다》는 정독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필자는 이 책의 3장(문자), 4장(제지), 5장(조판인쇄), 6장(활자 인쇄)을 훑어봤다. 왜냐하면, 저자가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한자의 구조, 중국의 종이문화 및 각종 용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중국 문헌뿐만 아니라 서양 문헌들까지 참고하는 저자의 폭넓은 지식 편력에 깜짝 놀랄 것이다. 친절하게도 이 책의 역자는 독자들이 저자가 참고한 책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국역본 제목까지 알려줬다. 1장, 2장, 그리고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7장만 봐도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려는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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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3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13 17:39   좋아요 1 | URL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역사’ 속에 영원히 갇힌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페크pek0501 2018-02-14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감탄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건 해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사실은 없다.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니체)라는 문장을 새삼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8-02-14 15:22   좋아요 0 | URL
역사를 바라볼 때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해석하면 좋은데, 이게 쉽지 않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