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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증 - 사이코 북스 03
이반 워드 지음, 태보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공포는 진화에 핵심적인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공포 자극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보다 여기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사람은 뱀에 공포를 느낀다. 뱀에 대한 공포는 진화론적 접근 방식이 통용된다. 오랜 야생 생활을 한 원시 인류는 뱀을 위험 대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뱀에 대한 공포는 원시 인류가 위협적인 존재에게 대항하며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습성이라는 점에서 진화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나 광장공포증처럼 실질적인 위험이 실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공포를 ‘공포증(phobia)’이라 부른다. 공포증이 신체적 반응(경직된 몸, 식은땀, 두근거림 등)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선 아직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 프로이트(Freud)의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는 공포증을 부조화, 모순의 요소들이 포함된 감정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공포증을 바라본다면, 공포증은 ‘비합리적인 두려움’[1]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진화론적 측면만으로 공포증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증을 진화의 산물로 보는 관점이 ‘생물학적 이론’이라면, 정신적 외상(trauma)이라는 자극이 가해져서 공포증이 유발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외상 이론’이다.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서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치콕은 이런 인물들의 동기를 설명하거나 극적인 결말을 유도하기 위해 외상 이론이 반영된 장면을 연출했다. 이반 워드(Ivan Ward)의 《공포증》(이제이북스, 2002)은 히치콕의 영화 <새>에 반영된 외상이론과 영화에서 표현된 등장인물의 공포증을 분석한다.
프로이트는 공포증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공포증을 ‘마음속에 있는 공포의 근원’으로 가정했다.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는 증상을 ‘학교 공포증’이라고 한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만나기 두려워서 등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등교 거부가 아이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봤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의 애착 대상은 엄마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지고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병적 불안’이 공포증 형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공포증》은 문고본 형태로 만들어진 책이라서 깊이 있는 내용이 부족한 편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존하다시피 공포증을 설명하고 있어서 공포증에 대해 다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저자는 멜라니 클라인(Melani Klein)의 이론을 인용했지만, 그녀는 프로이트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정신분석학자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공포증은 친숙하지 않은 환경(또는 대상)에 적응하고자 나타날 때 나타나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공포증은 꼭 병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정상적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위험이나 고통이 예견될 때, 또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공포증을 경험하게 된다. 공포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공포증은 내 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을 피하지 말고 맞서는 태도가 중요하다. 불확실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공포증은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되는 어정쩡한 동반자다.
[1] 《공포증》 14쪽
※ Trivia
* 사자, 마녀, 의상(衣裳) : 가상의 위험들
*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 - 상징으로서의 공포
* 공포, 공포 : 에드거 앨런 포
이 책의 목차 제목이다. 밑줄이 친 목차 제목은 유명한 소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자, 마녀, 의상’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 2005)의 1부 제목(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다. 원제의 ‘Wardrobe’을 ‘옷장’, ‘옷(의상)’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공포증》의 역자는 루이스의 소설을 잘 몰라서 그런지 ‘옷’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는 호레이스 매코이(Horace McCoy)가 1935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They Shoot Horses, Don’t The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작품은 아미티지 트레일(Armitage Trail)의 소설 『스카페이스』와 함께 동명의 번역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역자는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작품을 번역한 정진영 씨로 ‘정탄’은 그의 필명이다. 아미티지 트레일과 맥코이의 소설 모두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
‘공포, 공포’는 에드거 앨런 포(E. A. Poe)의 소설에 나오는 명대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의 미완성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창비, 2017)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만나는 순간 두려움에 떨면서 ‘테켈리 리, 테켈리 리(Tekeli-li, Tekeli-li)’라고 외친다. 주인공이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 외치는 알 수 없는 말을 이반 워드가 ‘공포, 공포’로 패러디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