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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자연사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유령 현상에 대하여
로저 클라크 지음, 김빛나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11월
평점 :
영국은 유령이 많이 출몰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유령은 헨리 8세(Henry Ⅷ)의 두 번째 왕비 앤 불린(Anne Boleyn)의 유령이다. 그녀가 참수된 런던탑 주변에 밤마다 목 없는 앤 불린의 유령이 떠돈다는 도서 전설이 있다. 유령을 믿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다. 로저 클라크(Roger Clarke)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열네 살의 나이에 최연소로 영국 심령연구학회(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 SPR) 회원이 되었다. 클라크는 유령이 자주 목격되는 고스트 스팟(Ghost Spot) 여러 군데를 방문했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하여 클라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유령은 한 차례 목격된 후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유령의 실체를 규명하는 대신에 유령 목격담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시대별로 유령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반응을 확인했다. 《유령의 자연사》는 유령의 존재를 인식하고, 유령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내면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유령의 자연사》는 ‘유령’에 관한 책이 맞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령이 아니다. 혹시 당신이 무시무시한 유령 이야기를 접하고 싶어서 《유령의 자연사》를 읽어보려고 한다면, 나는 말리겠다. 《유령의 자연사》는 ‘유령’을 주제로 한 책이지, ‘유령의 역사’에 관한 책은 아니다. 따라서 ‘끔찍하고 무서운’ 유령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심령사진이 많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심령사진으로 알려진 ‘레이넘 홀의 브라운 레이디(The Brown Lady of Raynham Hall)’를 제외한 나머지는 조작한 것으로 판명된 가짜 심령사진들이다. 어느 일간지에 실린 책 소개 단신에는 이 책을 ‘유령 백과사전’으로 소개했다.[1] 어디서 구라를!
‘유령 목격담’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해서 절대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저자는 유령 이야기를 즐기는 옛사람들의 대중심리를 간파하여 유령의 실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흔히 유령이라면 하면 단순히 ‘사람을 놀라게 하는 불가사의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유령의 자연사》는 이 통념을 반박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유령은 ‘감정의 영역’[2]이다. 즉 유령은 ‘보이지 않는 실체’를 믿고 싶은 사람들의 환상과 열광이 만들어낸 그림자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유령’이라는 그림자에 놀라 경기를 일으키고 뒷걸음질 친 것이다. 고스트 헌터(Ghost Hunter)의 원조는 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괴롭히는 악령의 실체를 확인하는 동시에 악령에 맞설 수 있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1837~1901년)에 강신술, 교령회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유령을 불러들이는 영매는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당연히 유령 이야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유령이 목격되는 장소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유령을 내세워 돈 좀 벌어보려는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렸다. 그래도 유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지 않았다.
개인의 출신 배경과 직업 등에 따라 유령의 개념을 인식하는 태도가 결정된다. 상류층과 하류층은 유령을 믿는 성향이 강하고, 중산층은 유령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계급을 초월하여 전 국민이 유령을 믿는 ‘흠좀무(‘흠, 이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한 상황이 나올 때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전역에 알려진 ‘몽스의 천사들(Angels of Mons)’은 쇼비니즘(chauvinism, 맹목적 애국주의)이 만든 유령 이야기다. 몽스라는 지역에서 독일군과의 혈투를 벌인 영국군은 궁지에 몰렸지만, 하얀 형상의 천사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승리했다. 몽스 전투에 참전한 영국 군인들은 이 기적 같은 일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천사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지 않았고, 영국 정부와 언론은 ‘몽스의 천사’를 영국군의 수호성인이라고 선전했다. 누구도 ‘몽스의 천사’를 의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지 않으면 ‘반애국자’로 몰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것에 접하면 확실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곧 그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령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유령 목격담에 쉽게 흥분한다. 과학이 발달해도 유령이 사라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누군가는 명성을 얻기 위해 유령을 만들고, 그 유령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결국, 유령은 망자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인류의 감정 안에 탄생하는 ‘욕망 덩어리’다. 지금도 사람들은 조작과 착각이 뒤섞인 ‘욕망 덩어리’를 보기 위해 어디든지 달려간다.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보고 싶어 한다. 유령을 보려는 헛된 욕망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들을 기만하는 ‘욕망 덩어리’는 재생산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비슷한 ‘유령’을 만들어 낸다. 정말 유령은 만들어 내기가 쉽다.
[1] [<책꽂이-새 책200자> 유령의 자연사] 서울경제, 2017년 11월 11일
[2] 《유령의 자연사》 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