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초조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초조감은 불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인류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잘 먹고 잘살게 됐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의 정도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부귀, 성취 등을 놓고 한숨은 쌓여간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 카프카 전집 1(솔출판사, 2017)

* 프란츠 카프카 변신(열린책들, 2009)

* 프란츠 카프카,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변신(문학동네, 2005)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민음사, 1998)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늘 일과 시간에 쫓겨야 하는 비정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상이 버거운 외판원인 그레고리 잠자(Georg Samsa)는 자신이 어느 날 아침 벌레 한 마리로 변해 버린 것을 알아차리고도 우선은 그냥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군.

사람이란 잘 만큼 자야 해.” [1]

 

 

숙면 시간을 조금 더 원하는 잠자의 생각은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잠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소시민이다. 일밖에 모르는 획일화된 삶은 잠자의 몸과 마음을 속박한다. 그는 오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아파본 적 없으며 결근을 한 적도 없다. 이때 잠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일벌레. 따라서 잠자의 변신은 갑작스러운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다. 이미 그의 정신은 변하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일상을 사는 동안 잠자는 점점 벌레로 변하고 있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레로 변한 잠자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족들은 잠자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그를 벌레처럼 대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고, 어머니는 벌레가 된 아들을 보면 기겁한다. 벌레로 변한 자신을 살갑게 대하던 누이동생마저 등을 돌린다.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껍질에 박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숨어있고 불안해할 뿐이다.

 

 

 

 

 

 

 

 

 

 

 

 

 

 

 

 

 

 

* 양정호 하청사회(생각비행, 2017)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은 회사를 위한 수단적 존재로 전락한다.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란 용어가 있다. 회사에 출근했지만 누적된 피로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근로자의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몸이 아파도 무조건 일터로 향한다. 아파서 결근하면 수당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승진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방 안에서 전전긍긍하는 잠자는 프리젠티즘에 직면한 근로자의 모습이다. 잠자는 한 번의 결근 때문에 자신이 게으른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 때문에 부모를 욕보일까 봐 결근을 스스로 거부한다. 잠자는 출근하는 데 실패하지만, 어차피 평소대로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잠자는 가족뿐만 아니라 집에 방문한 직장 상사의 눈치도 살핀다. 이때 가족과 직장 상사는 ()’이고, 잠자는 ()’이다. 갑의 위치에 있는 가족과 직장 상사는 근로자인 잠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준다. 결국, 궁지에 몰린 근로자는 주체성을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버린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

* 한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

* 박이문 문학 속의 철학(일조각, 2011)

*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미다스북스, 2017)

 

 

 

카프카가 이미 우려했던 대로 지금 우리 사회에 자의든 타의든 일만 하는 일벌레가 많아졌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심각하게 일만 하는 사람을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 비유했다. 그녀는 맹목적인 노동을 경계한다. 그렇다면 잠자는 노동하는 벌레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아렌트의 분석이 근대사회의 인간을 설명하는 것에 적합할 뿐, 자기 착취에 빠져 피로해질 때까지 일하는 후기 근대사회의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자기 착취는 말 그대로 지배자(근로 관리자)가 없는 착취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노동을 강요하는 지배자가 되는 동시에 노동에 시달리는 일의 노예가 된다. 혼자서 12, 즉 갑을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한다. ‘나는 (결근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라는 자기 긍정은 근로자를 지치게 하는 해로운 주문(呪文)이다. 잠자는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어떻게든 침대에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해.”[2] 그는 자기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가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없다. 그렇지만 잠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누이동생이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잠자가 반드시 이뤄야 할 삶의 성과이다. 그러나 잠자는 자신의 삶의 성과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잠자의 삶의 성과는 잠자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벌레로 변하는 바람에 움직임이 둔해진 잠자의 모습은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누적된 후기 근대의 인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피로사회속에 사는 현대인은 소진 증후군에 시달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은 스스로 가하는 채찍질이다. 전염병의 공포에 사로잡힌 중세 시대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마구 채찍질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태한 자라고 꾸짖으며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계속 채찍질한다. 이제 우리는 채찍질을 멈추고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 [3]

 

 

 

 

 

 

[1] 이주동 역, 변신 : 카프카 전집 1(2개정판, 솔출판사, 2003) 110

[2] 같은 책, 114

[3]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204쪽에 나오는 (굵게 표시를 한) 문장을 변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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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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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02 12:03   좋아요 2 | URL
젊은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정년퇴임 연령이 와도 일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말로 재수 없으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어요. 중장년층 노동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요. 게다가 인공지능의 노동 투입 이야기까지 나오니 일할 의지가 사라질 만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