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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3월
평점 :
어린 시절에 공부하지 않고 재미있는 책만 읽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소중한 보물이 있었다. 책장에 가득 채워놓은 오래된 책들이었다. 나는 곰팡내가 풍기는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거기에는 현실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일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데 지루할 틈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지경이다. 책 속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존경하는 과학자, 작가, 정치인 그리고 한 시대를 살다가 간 뛰어난 선인들도 있다. 노력에 따라서 그들을 만날 수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정성을 쏟아 읽은 책마다 번호를 매겨 나갔다. 그때는 읽은 책의 권수에 집착했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얇은 책도 포함했다.
어느새 십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정신없이 바쁘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먹고사니즘’에 치여 비타민처럼 필요한 책들을 외면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책을 읽던 친구들은 책과 담쌓은 지 오래다. 경쟁사회에서 낙오는 인생의 실패와 다름없이 여겨진다. ‘먹고사니즘’의 열망이 클수록 민주적 가치고 나발이고 돈벌이에 도움만 된다면 뭐든지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고사니즘’은 단순히 생존본능을 위한 투쟁 의식이 아니다. 지나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이기주의의 극치다. 이 세상에 낙오하지 않고 한가롭게 독서를 하는 일은 진정 불가능한 일인가. 잠시라도 책에 한눈을 팔면 우리 삶이 정말 불행해질까.
잠재했던 유전인자가 몇 대를 뛰어넘어 불쑥 나타나는 것을 격세유전이라 한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를 읽으면 그 말이 실감 난다. 노후를 걱정하는 오늘의 6, 70대. 이들을 ‘4 · 19세대’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도 사회에 대해 고민했던 시절, 인생의 꽃이라 불리는 20대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는 문학청년, 즉 ‘문청(文靑)의 연대’였다. 젊은이들의 관심은 시와 소설, 그리고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었다. 대학생들은 <사상계>를 끼고 다녔고, 그들의 문화적 영웅은 김승옥이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표현대로 4 · 19세대는 4 · 19혁명과 5 · 16 군사쿠데타 사이에서 20년간 방황했다. 민주화를 열망했던 젊은이들은 ‘가능성과 좌절’ 사이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답답하고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책을 손에 쥐었다. 그렇지만 책이 민주주의에 대한 허기, 미래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했다.
《광장》(최인훈의 소설)의 (명)준은 밀실도 광장도, 그것이 상징하는 남한도 북한도, 자유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거부하고 나섰다. 결국,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 뒤 배를 타고 가다가 숨 쉬는 바다로 몸을 던진다. (전)혜린은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다. 그녀는 자기가 독일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진실 어리게 글을 쓰고 싶어 했다. 《환상수첩》(김승옥의 소설)의 정우는 보다 나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정우를 어쭙잖은 아이로 여겼다. 정우의 귓가에 울리는 “무관심 하라”라는 말은 ‘혁명’에 갈망한 청년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독일 유학생 (전)혜린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진실 어리게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무리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도 번역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번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소설을 쓰겠다는 소망을 채 이루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쉽게 알려줄 대학생 친구’를 만나지 못해 종이에 적힌 법 한 글자 한 글자 보듬느라 힘겨워했다. 이 네 명은 젊은 4 · 19세대들의 사회적 · 심리적 한계상황을 겪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은 답답하고 허무한 마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들의 삶과 희망은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생애로 종이에 남게 되었다.
그 뒤로 80년대 사회변혁의 맹렬한 주역으로 대학생들이 나섰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절망에 빠진 오늘, 50년 전의 그 암담한 심경은 격세유전으로 재현되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상황은 고뇌의 진원지가 정치가 아닌 경제라는 점이다. 60년대에는 노력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팽배했다. 학생들은 짜장면을 먹지 않고, 버스 등교 여덟 번 포기하면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를 ‘내 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200원짜리 책을 읽었고, 책을 통해 희망으로 이어줄 삶의 길을 찾고 싶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독서는 사치다. 그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들게 모은 돈은 입시 참고서, 어학 학습서, 취직 수험서를 마련하기 위한 비용이 된다. 한가롭게 소설을 읽을 수 없다. 독서하는 세대가 사라지면서 교양의 의미도 점차 희미해진다. 4 · 19세대가 공유한 교양은 삼중당 문고라면, 삼포세대의 교양은 취업상식 사전이다. 취업상식 사전은 ‘내 책’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취업을 목표로 상식을 달달 외운다. 취업만 성공하면 지긋지긋한 책을 안 봐도 된다.
지금으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은 ‘삼포 세대의 독서문화사’를 어떻게 기록할까. 삼포세대가 역사로 기록될 앞날이 오려면 한참 멀었다. 사실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앞선다. 삼포세대가 겪은 좌절과 모멸감이 다음 세대에 이어질까 봐 걱정된다. 이 세상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이 더 많아지면 안 된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의 저자는 서문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를 기억하는 일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아물지 않는 상처’라고 말한다.
‘살아남지 못한 자’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들씌워진 가면을 잠시 벗겨낸 자리에 남아 있는, 아물지 않는 상처이다. 그래서 우리 삶과 역사는 그 상처와 고통에 빚지고 있다. (8쪽)
아주 오랫동안 깊게 파인 역사의 상처를 직면하는 일은 무척 괴롭고 아프다. 그렇지만 이 상처와 고통의 연속을 끝내려면 과거의 기록에서 교훈을 찾아내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아픈 역사를 잊고, 덮는다고 해서 무너진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픈 역사가 만들어 낸 상처가 덧난다. 그 상처가 덧나면서 생기는 통증이 다음 세대에 이어진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는 과거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