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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니물라
바른번역(왓북) / 2016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 사키(Saki, 1870~1916). 이 세 사람 모두 ‘공포소설’을 써본 작가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적지 않은 단편소설들을 남겼다. 세 작가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다. 포의 죽음은 기이하다. 그는 혼수상태로 병원에 실려 나갔고,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여전히 그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직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모파상은 정신 착란 증세로 고생했다. 그는 자살 기도를 한 후 정신병원에 격리 수용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애국심이 강했던 사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적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공포 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에서 ‘이 작가’를 ‘포의 초창기 후예’라고 극찬했다. 지금부터 작가를 소개하면 이런 작가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이 작가'가 누구냐면 아일랜드 출신의 피츠 제임스 오브라이언(Fitz James O’Brien, 1828~1862)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오브라이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기괴함과 공포를 다룬 걸작들을 감상할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오브라이언의 천재성이 포의 수준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아니, 그러면 애초에 '포의 초창기 후예'라고 띄워주지 말던가.
오브라이언의 대표작 『그것은 무엇이었을까?(What was it?)』는 모파상의 공포 단편소설『오를라(La Horla)』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1852년에 오브라이언은 미국으로 귀화하여 남북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터 한가운데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일찍 마감했다. 생전에 오브라이언이 잡지에 발표한 작품의 수는 60여 편에 이른다. 어떻게 보면 오브라이언도 '수명이 짧은 다작 작가'인 셈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후 선집 형태로 출간되었다.
오브라이언의 또 다른 대표작 『다이아몬드 렌즈(The Diamond Lens)』는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되지만, 이 작품 속에 있는 초자연적 현상, 자기파괴에 이르는 인간의 기이한 집착 등의 소재는 공포소설에 나오는 문학적 장치로 봐도 무방하다. 린리(Linley)는 ‘현미경 덕후’이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일. 그는 아주 미세한 세포를 관찰할 수 있는 ‘궁극의 렌즈’를 가지고 싶어 한다. 린리는 친구 시몬(Simon)의 주선으로 영혼과 대화하는 영매로 활동하는 울프스 부인을 만난다. 그녀의 도움으로 최초로 현미경을 발명하여 미생물을 관찰한 네덜란드의 과학자 레벤후크(Leeuwenhoek,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레이우엔훅’이라고 해야 한다)의 영혼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린리는 레벤후크의 영혼으로부터 ‘궁극의 렌즈’를 제조하는 비법을 얻는다. 린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현미경 생각뿐이다. 그는 기어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렌즈로 현미경을 완성하여 미세한 자연의 세계를 마음껏 탐닉한다. 그가 현미경으로 물방울을 관찰하다가 그 속에 여성의 외형을 닮은 조그마한 존재를 발견한다.
자꾸 분열하는 이 새로운 세상을 한마디 말로 성급히 정의하는 동안, 무지갯빛 숲 속 공터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형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좀 더 유심히 관찰했고 분명 내 눈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 신비로운 존재가 더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리며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중략] 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루엣만 인간과 닮았고 그 외는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했다. 인간 세상의 어떤 미인보다 아름다웠고, 미의 기준을 뛰어넘은 모습에 절로 숭배할 정도였다.
(24쪽)
린리는 물방울 속에 사는 작은 여인을 ‘작은 영혼’을 뜻하는 ‘아니물라(Animula)’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는 아니물라의 신비스러운 매력에 이끌리게 되고, 오로지 그녀를 관찰하기 위해 한시라도 눈에 렌즈를 떼어내지 못한다. 『다이아몬드 렌즈』는 관음증, 중독, 집착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모두 담아낸 독특한 작품이다. 관음증은 다른 사람을 훔쳐보는 것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렌즈 너머로 아니물라를 은밀히 관찰하는 린리의 관음증은 중독과 집착이 만들어낸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다. 오브라이언은 독자에게 자신의 렌즈를 건네준다. 독자는 이 렌즈를 통해서 작가가 적나라하게 파고든 인간 내면의 본성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