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하는 입 - 혐오발언이란 무엇인가 질문의 책 2
모로오카 야스코 지음, 조승미.이혜진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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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의 거리에 “조선인들을 떠나라” “조선인은 기생충이다”라고 무시무시한 구호를 외치는 일본 우익단체의 시위가 부쩍 늘어났다.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 회원들은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역 주변 한인 타운에 모여 매주 혐한 시위를 벌인다. 파리채로 태극기를 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이도 있다. 재특회는 2007년 설립돼 인터넷을 중심으로 반한 시위를 주도하는 단체다. 이 단체는 등록 회원이 1만여 명에 이르고 연 1,000만 엔에 이르는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전통적인 우익단체와 달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시위 현장 동영상을 전파하고 온라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방법으로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했다. 그래서 ‘넷우익(Net 우익)’으로 불리기도 한다. 5.18 민주항쟁을 폭동으로 폄훼한 ‘일베’와 흡사하다.

 

재특회가 반한 시위를 하는 일차적 명분은 ‘재일 한국인이 일본 내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어서 그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특별 영주 자격을 철폐하라고 외친다. 재일 한국인은 특별 영주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범죄를 저질러도 모국으로 추방당하지 않는다. 재특회는 이 법이 다른 불법 체류 외국인과 비교할 때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국인을 비롯해 재일조선인, 외국인 등 특정 민족에게 증오 섞인 표현을 쏟아낸다. ‘혐오 발언(hate speech)’은 인종, 민족, 종교, 국적, 직업 등으로 나뉘는 특정한 집단에 대해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부추긴다. 단순히 구호만 외치는 것도 아니다. 조총련계 학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은 혐오 발언이 부른 참극이었다.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일본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일본 언론은 한술 더 떠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그 결과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혐오 발언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재특회의 혐한 시위가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오히려 한국 언론보다 미국, 유럽 언론이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치가 자행한 인종차별 경험 때문인지, 혐한시위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혐오 발언이 횡행함에 따라 우려스러운 것은 재일조선인들의 처지다.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한 조치로 해석되지만, 일본 내에서는 혐오 발언 규제 법률을 제정하라는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UN 사회권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혐오 발언 규제에 나설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일본은 차별금지를 법률로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인종차별철폐협약(제4조)에 가입했지만, 헌법상 ‘표현의 자유’(제21조)를 이유로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은 법률로 규제하고 있다. 남의 일인 것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기에는 우리 사정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나 외신 언론을 받아 쓴 기사는 간혹 찾아볼 수 있지만, 직접 시위 현장이나 재일조선인 피해를 심층 취재한 기사는 보기 어렵다. 해외 현장이라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이슈의 당사국 언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이나 유럽 언론, 특히 중국 언론에 비해서도 혐오 발언에 대한 관심이 이례적으로 적다.

 

일본의 우익 정치가는 재특회와 손잡아 혐오 발언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과 좌익은 일본의 명예를 해친다고 보고 있다. 물론, 혐오 발언을 반대하는 우익도 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일본의 불명예로 왜곡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광적인 배타주의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1970년대부터 유신정권은 반한과 친북을 양산했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에도 색깔론이 반복되고 있다. 진보 진영에 대해 마구잡이로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는 어버이연합, 동성애와 다문화제도에 반대하는 일베의 모습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일과 좌익 낙인찍기와 비슷하다. 또 미래를 위해 과거의 국가 폭력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비판하는 것조차도 종북으로 매도하는 것은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일, 좌익 낙인찍기와 유사하다. 일본은 혐오 발언을 심각하게 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소수자 및 개인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는 혐오 발언을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만 인식한다. 김치녀, 홍어(광주를 비하하는 은어), 통구이(대구를 비하하는 은어) 그리고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조롱하는 혐오 발언이 인터넷상에서 쉽게 남발되고 있다.

 

우리나라 시민사회가 그나마 조금은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긴 하나 아직도 많이 미흡하다. 혐오 발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공감 여론이 깊게 형성되지 못한 상태다. 2012~2013년 일베 논란이 숱한 화제를 뿌렸을 때, MBC <100분 토론>에서 일베를 유해매체물로 지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주제로 토론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이때 토론 패널로 참여한 변희재는 일베를 유해매체물로 지정하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접속차단 등의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베 회원들을 극우주의자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혐오 발언 규제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표현의 자유’는 혐오 발언 규제에 반대하는 우익들이 불리할 때 사용하는 유일한 보루다.

 

‘표현의 자유’와 ‘인권 침해’.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자유 중에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혐오 발언 문제의 현황을 고발한 《증오하는 입》의 저자이자 변호사인 모로오카 야스코는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입장에 찬성한다. 다만,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혐오 발언의 용례를 정리한 가이드라인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베 회원 일부는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준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민주적인 보편 가치다. 그런데 일베와 재특회,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이런 보편 가치를 자신들만의 특권처럼 사용한다. 그것도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언어 폭행의 무기로 사용한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표현의 자유 의미가 왜곡되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한 시민사회 구성원이라면 시비를 가리고, 정도를 구분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서 대항하는 이성적인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소심한 독자 입장에서는 이념 진영을 떠나서 혐오 발언에 관한 더욱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되길 바랄 뿐이지만 그것마저 쉽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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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7 07:11   좋아요 0 | URL
일본의 시민운동이 어느 수준 단계에 올라섰으며 역사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님 말씀처럼 일본의 시민운동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자발적 시민단체가 등장하니까 일본 언론들은 ‘돌연변이’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혐한 시위를 반대하고, 거기에 행동으로 맞서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습니다. <혐오하는 입>을 읽은 뒤에 이일하 씨의 <카운터스>를 읽었는데, 제가 일본을 선입견으로 바라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