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같은 대도시를 거대한 장난감 인형 집이라고 가정해보자.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인형이 된 도시인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이런 조종의 끝은 생산성 향상에 맞추어진다. 도시 전체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각 개인은 정신과 넋을 잊은 채 날마다 살아간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자동차로, 시간에 맞추기 위해, 몸과 유리된 노동을 위해, 미친 듯이 움직인다. 세 끼 배불리 먹고 여기에 더하여 약간의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정도의 돈을 번다는 것이 이런 도시 생활을 무마해주는 자본주의의 선물이다. ‘쉴 새 없이 쇼핑하라’는 자본주의의 마법에 걸린 채 돌아가는 하루하루. 현대인을 매혹하며 진화하는 포장술은 그 알맹이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기에 성공했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 자본주의 대도시의 이런 문제들을 짚어냈다. 도시와 만나는 벤야민의 방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는 구경꾼처럼 현란한 야경에 온전히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다. 행인처럼 작은 걸음 하나를 옮길 때마다 이해득실을 따지며 도시를 오가지도 않는다. 도시의 산책자다. 벤야민은 근대 도시를 지켜보면서, 아름다우면서 야만적인 곳으로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허구적 대상)의 장소’라고 했다. 도시가 화려할수록 그늘도 짙다. 그늘에 가려진 도시의 얼룩은 우울이다. 욕망과 소비가 창궐하는 대도시의 한복판에서 사는 사람은 그 같은 한없는 반복에 심각한 권태를 느낀다.

 

서울은 근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른 도시다. 전통문화와 근대문화, 소비문화와 단절의 문화가 혼재한 ‘21세기 한국판 아케이드’인 셈이다. 서울은 한국의 정치권력과 행정 기능이 집중된 곳일 뿐만 아니라, 문화 지형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서울에 새롭게 형성되는 시가와 구조물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 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서울은 그 자체로 이미 희망과 꿈의 도시였다. 콘크리트 건물들, 특히 아파트는 그 욕망의 응집체다. 이 욕망은 재개발과 투기라는 이름으로 무한증식하며 허물고 새로 짓기를 반복한다. 우악스러운 건물의 모습에 도시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도시인 삶의 모습 또한 조금씩 변해갔다. 소유한 사람에게는 더 큰 여유를, 소유하려는 사람에게는 상실을 안겨준다.

 

도시는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장소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권력과 재력가들이 독차지하는 영역이었기에, 도시는 시민 중심이라는 실존적 개념을 이해 못 하고 있다. 주거공간은 시민의 개인 삶을, 도시는 시민의 공동생활을 보장하는 곳이다. 돈으로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주제가 되는 사회학적 원칙 대신 물질만능주의와 정부의 컬라버레이션에 조정되고 있다. 그 결과 콘크리트 집합체인 청계천, 광화문광장 등이 생겨났다. 파괴와 재건이 성장을 담보한다는 믿음만을 기초로 한 개발 계획은 오히려 도시를 초국적 자본의 투기 지역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기형적인 도시화는 과거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지워나간다. 오늘날의 도시는 더 이상 실존적 장소의식을 환기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적인 교류가 차단되어가는 소외의 공간이 되어간다.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고 자본주의 체제를 작동시키는 토대로서의 도시의 속성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시는 역사와 문화를 지닌 장소이자 삶의 환경이다. 도시의 미래는 인간과 도시가 맺는 여러 관계를 두루 품어 구상되어야 한다. 이는 살아가는 방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후손을 위해 지구를 보존해야 함을 누구나 인정하는 이 시점에, 우리가 자라온 터전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벤야민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도시를 기록하는 것은 결코 과거를 간직하거나 회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조건 지어지고 전개되는 바탕이자 맥락으로서의 공간을 보여주려는 것이며, 공간의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그의 기록 행위는 도시인의 소외감을 개인적 체험의 형태로 드러냄과 동시에 과거 기억의 재현을 통해 거기 맞서고자 하는 절실한 의지를 보여준다. 도시에서 얻은 천박한 욕망을 벗어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찬기가 힘들고, 떠났다가도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와 머물며 살 수밖에 없는 도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벤야민식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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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0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시는 단 하루라도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식물상태에 빠지고..
단 하루라도 빼내지 않으면 더러워지는 곳.

사람들이 너무많이 모여 있으니 사람 귀한줄 보다는 사람이 천시받기 마련이고
그곳에 자본은 모두를 조종하는거 같더군요.

도시계획을 배웠지만 여전히 도시는 탈출을 감행하고 싶은 곳 1순위 ㄷㄷㄷ

cyrus 2015-09-03 18:07   좋아요 0 | URL
저는 파리지옥에 빠진 파리 한 마리 같아요. 도시생활의 달콤한 맛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여 도시생활에 빠져나오지 못하겠어요.

방랑 2015-09-03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난 우리 또래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면 꼭 꿈틀거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얘기는 오 분도 안 돼서 끝나버립니다.  

김승옥, 서울,1964년 겨울

cyrus 2015-09-03 18:09   좋아요 0 | URL
도시의 차가운 현실을 설명해주는 명문장이군요. 좋은 문장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