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생의 묘약』 (L'Elixir de longue vie, 1831년, <인간 희극> 제2부 철학 연구)
** 이야기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 후안은 여자 없이 단 하루도 살지 못하는 방탕한 귀족이다. 그의 눈빛과 몸짓에 여심은 여지없이 흔들렸다. 그의 유혹에 홀렸던 여인이 전 유럽에 걸쳐 2000명에 달한다. 15세기 이후 수많은 작가는 돈 후안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재료로 다양한 인격의 돈 후안을 만들어냈다. 17세기 스페인의 신부 출신 작가 티로스 데 몰리나는 1630년에 《돈 후안 :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을유문화사, 2010)라는 희곡을 썼고, 그다음에 오늘날 가장 많이 연극 무대에 오른 몰리에르《동 쥐앙 또는 석상의 잔치》(기린원, 2010)가 나왔다. 몰리에르의 동 쥐앙은 몰리나의 돈 후안에 영향을 받았지만, 주인공의 면모에 차이가 있다. 몰리나의 돈 후안은 전형적인 바람둥이, 호색한의 대명사다. 그는 수많은 여성을 유혹하고 파멸시킨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오직 정복일 뿐이다. 몰리에르의 동 쥐앙은 끝까지 자유를 원하고 굴복하지 않는 시대의 반항아로 등장한다. 그의 바람기는 속박을 넘어서려는 저항 행위다. 사회제도, 종교의 규범, 귀족의 권위 같은 것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사랑할 수 있는 자유만을 숭배한다. 길들지 않는 자유인 동 쥐앙은 17세기 이성주의에 반기를 든다. 이러한 파격적인 설정 때문에 《동 쥐앙》은 당시 초연 2주 만에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발자크의 단편소설 『영생의 묘약』 역시 돈 후안 전설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지만, 감각의 쾌락을 더 누리려는 욕심에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싶은 존재로 나온다. 기존의 돈 후안 이야기가 엽색 행각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발자크의 돈 후안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악마적 면모가 강하다. 또한, 발자크의 돈 후안은 스페인의 세비야가 아닌 이탈리아 도시 페라라에 거주한다. 돈 후안의 아버지 바르톨로메오는 곧 죽음을 앞둔 나이에 접어들자 삶에 대한 미련이 생긴다. 돈 후안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에게 위로하는 척하면서 내심 그가 얼른 죽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죽으면 유산은 고스란히 자신이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메오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들에게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 ‘영생의 묘약’을 자신의 몸에 바르라고 부탁한다. 아버지의 기묘한 유언을 믿지 못한 돈 후안은 시험 삼아 ‘영생의 묘약’을 아버지의 시체에 발라보기로 한다. 아버지의 오른쪽 눈에 묘약을 바르자 놀랍게도 그 눈이 번쩍 뜨인다. 부활의 조짐을 알리는 눈물방울이 공포에 떠는 돈 후안의 손등에 떨어진다. 아버지가 완전히 부활한 줄 알았던 돈 후안은 아버지의 눈을 뽑아버린다. 아버지의 유언을 거역한 돈 후안은 급하게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고 장례식을 치른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마음껏 호화로운 방탕을 누린 돈 후안이었지만, 그도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다. 점점 늙어가는 돈 후안은 아버지처럼 온갖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인생을 허망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당부한다.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묘약을 자신의 몸에 바르게 해달라고. 그런데 아들은 묘약을 돈 후안의 얼굴과 오른쪽 팔에 바르고 말았다. 돈 후안의 부활을 기리는 시성식이 진행되는 과정에 돈 후안의 얼굴만 죽은 몸통에 떨어져 나와 살아난다. 얼굴만 움직이는 돈 후안이 자신의 시성식을 주관하는 사제의 머리를 물어뜯으면서 소설은 이렇게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오귀스트 로댕  「우골리노」 (1882년)

 

 

돈 후안의 머리가 사제의 머리를 물어뜯는 엽기적 결말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등장하는 우골리노 백작 이야기와 흡사하다. 우골리노는 자식과 함께 감옥에 갇혀 굶어 죽는 형벌을 당한 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죽은 아이들의 시신을 먹는다. 지옥에 간 우골리노는 자신을 감옥에 갇히게 한 대주교를 다시 만나, 그의 머리를 물어뜯는 끔찍한 복수를 한다. 발자크는 단테의 《신곡》 한 장면을 패러디하면서 머리만 살아남은 돈 후안을 반종교적 악마로 그려냈다. 머리가 신체에 분리되어 무시무시한 존재로 변형되는 설정 하나로 『영생의 묘약』은 섬뜩한 공포 효과를 주는 데 성공했다. 마치 결말에 이르러서야 충격적 장면 하나로 관객의 심리를 압도하는 단편 공포영화를 보는 듯하다. 정말 결말이 인상적이다. 원래 돈 후안이라면 지옥 불에 떨어져 천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발자크의 돈 후안은 영생의 꿈이 도달하지 못하여 끔찍한 괴물이 되는 벌을 받지만, 끝까지 참회를 거부한다.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 권위를 거부하고 도덕 윤리마저 잘근 씹어 먹는 악마 본성을 드러낸다. 괴물이 된 돈 후안에게서 ‘승리자 같은 오만방자함’(《시지프 신화》 중에서, ‘카뮈 전집 특별판 2권’, 347쪽)이 느껴진다. 

  

돈 후안은 사랑도 언젠가는 내 몸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달콤한 감정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종말에서 비롯되는 허무감을 피하기 위해서 여성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그래서 그는 이천 명이나 되는 여성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여성과의 만남을 만끽하는 즐거움을 평생 죽을 때가지 누리고 싶은 것이다. 여기에서 카뮈는 돈 후안에게서 부조리한 인간의 면모를 발견한다. 죽음에 직면하는 발자크의 돈 후안은 온 몸을 다해 자연의 섭리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어도 아직까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모른다. ‘영생의 묘약’의 효과를 믿고 오로지 현재 그 자체를 즐기려고 한다. 그렇지만, 임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게 되자 영생이라는 헛된 욕망을 드러낸다. 현재에 누누릴 수 있는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삶은 죽음의 두려움에 끝까지 침묵하기 위한 반항이다. 발자크는 카뮈보다 먼저 돈 후안의 운명을 통해 실존의 부조리를 역설했다. 유한한 삶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돈 후안. 카뮈는 돈 후안의 죽음을 신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한 웃음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발자크의 돈 후안은 죽지 않았고, 신이 내린 벌을 받은 것도 아니다. 신에 도전하는 인간의 허세다. 어쩌면 발자크는 자신이 각색한 돈 후안을 괴물로 변신함으로써 신에 도전하는 인간의 허세를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발자크도 돈 후안처럼 부조리한 세상을 살다 갔으니까.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수백 수천수만 번이나 밀어 올리는 행위를 해야만 했던 시시포스처럼 발자크는 평생 해도 완성하기 힘든 <인간 희극> 을 쓰기 위해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서 종이와 씨름을 했다. 글을 써야하는 와중에도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발자크는 ‘문학의 시시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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