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면 사춘기 시절 한두 번쯤 야한 책을 접한 경험이 있다. 야한 사진이 많은 외국 잡지는 ‘빨간 책’이 되어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읽었고, 은밀히 유통되던 일본의 야한 소설 번역본도 호기심을 자극했었다. 오늘날, 성에 대한 금기의 벽이 낮아지면서 야한 사진을 접할 기회는 주변에 널려 있다. 서점에 가서 책을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통해 음란물을 다운로드 받고 감상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학교에서 성인 잡지나 ‘빨간’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던 시절은 오히려 순박했다.
《서재 결혼 시키기》(지호, 2002)의 저자 앤 패디먼은 열네 살에 아버지(국내에 출간된 《평생독서계획》의 저자이자 작가, 비평가로 활동했던 클리프턴 패디먼)의 서재에 있던 존 클레랜드의 소설 《패니 힐》을 읽고, 부모도 성적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순진한 딸이 《패니 힐》을 보지 않도록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패디먼은 용케도 그걸 찾아내서 읽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부모님 방 어딘가에 숨겨놓은 ‘빨간 비디오’를 발견하여 처음으로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처럼 야동이 없었던 시절에 사춘기를 보낸 서양의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서재에서 꽂힌 야한 책으로 성적 호기심을 충족했다.
캠블 기슬린이라는 미국의 작가는 《미술 걸작의 보고》를 몇 시간씩 끌어안고 살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슬린이 예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기슬린은 《미술 걸작의 보고》에 수록된 마네의 ‘올랭피아’ 컬러 복제본이 매우 좋아서 책을 애지중지하게 여겼다. 그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를 보면서 음란한 상상에 빠졌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모델이 두 다리를 약간 꼬는 바람에 자신이 가장 보고 싶은 은밀한 부분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시인인 찰스 벨은 아버지의 서재에 보관된 《아라비안나이트》의 외설적인 장면만 찾아 읽었다고 한다.
나는 기슬린의 솔직한 고백에 공감한다. 나 역시 기슬린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인 계몽사에서 나온 《세계 명화 백선》을 소중한 보물처럼 보관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네다섯 살쯤에 부모님이 사준 《디즈니 명작 동화》를 읽었는데 아마도 부모님이 계몽사 동화 전집과 《세계 명화 백선》을 함께 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님은 《세계 명화 백선》 을 읽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 한번 이 책을 얻게 된 경유를 알고 싶어서 부모님께 물어봤는데 내가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 의아했다. 《세계 명화 백선》이 어떻게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기억의 잃어버린 고리로 남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명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이 책을 자주 봤다. 《세계 명화 백선》은 고전주의 회화부터 현대 회화까지 각각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대표작을 엄선하여 모은 책이다. 당연히 이 책에도 마네의 ‘올랭피아’가 있다. 어렸을 땐 마네가 누군지도 몰랐으며 그냥 ‘야한 그림’으로 생각했다. 《세계 명화 백선》에 ‘야한 그림’이 많았다. 르누아르의 누드화도 있었다. 누드화가 있는 장만 골라 보는 것을 엄마에게 들킬까 봐 《세계 명화 백선》을 방 안에 몰래 보곤 했다. 침을 꿀꺽 삼키면서 책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봤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야한 상상을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미술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야한 그림’이 훌륭한 명작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중학생 때였다. 마네의 그림보다 더 야한 야동 장면은 사춘기의 마음을 밤새도록 뜨겁게 만들었고, 예전처럼 《세계 명화 백선》 의 누드화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야동 세대(?)라서 ‘빨간 비디오’나 ‘빨간 책’과 관련된 추억은 없다. 그렇지만, 야동이 나오기 전에 《세계 명화 백선》을 통해서 처음으로 성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세계 명화 백선》은 내 손길이 닿지 않은 책장 한 구석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 이 책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어린 시절 나를 즐겁게 해준 ‘야한 그림’이 있었고, ‘야한 그림’ 덕분에 마네, 르누아르가 누드화를 즐겨 그린 변태 화가가 아니라 최고의 인상주의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계 명화 백선》을 읽은 덕분에 미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신체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화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간혹 미술관에 전시된 누드화를 보고, 자위행위를 하는 관객이 있다고 한다. 미술이 무엇인지 모르고 야동을 즐겼다면 나는 그 관객처럼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변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