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가 적용되는 날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책을 팔려는 출판사와 책을 사려는 독자의 마음은 심란하다. 출판사는 창고에 남은 재고를 팔기 위해서 할인 행사를 진행하고, 독자는 반값 할인의 마지막 혜택을 누리려고 지갑은 연다. 그러기 위해서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온라인 서점 혹은 출판사 이벤트 정보를 놓치지 않는다. SNS 독서 관련 커뮤니티에 간혹 책을 싸게 사는 곳을 알려달라는 글이 보인다. 지금 독자들은 책 살 돈은 없어도 이런 마지막 기회를 그냥 팔짱 낀 채 보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도입되면 낮은 할인율이 적용된 가격으로 책을 사야 하므로 지금이야말로 싸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마치 지구가 종말을 앞두는 모습 같다. 1910년에 핼리 혜성의 꼬리가 지구를 스친다는 관측이 알려졌을 때, 전 세계는 공포와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혜성의 꼬리에 치명적인 독가스가 있다는 잘못된 소문까지 떠돌게 되었다. 종말론이 확산하자 사람들은 죽기 전까지 돈을 마음껏 쓰고 다녔다. 지구가 사라진다면 돈 쓸 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남은 돈으로 하고 싶은 일에 다 썼다. 그러나 혜성의 꼬리가 지구를 스쳐 지나간 날, 지구는 어제처럼 평온했다.

 

지금 ‘도서정가제’라는 혜성이 다가온다. 벌써 도서정가제 도입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독자와 출판사는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도서정가제를 도입하면 책을 구매하지 않으려는 독자들의 불만이 많아졌다. 도서정가제 도입을 앞두고 출판사들의 할인 행사에 책을 사들이는 우리 독자들의 모습이 지구 종말이 두려워서 어떻게든 돈을 쓰고 보는 사람들과 같다. 그렇다고 나 또한 출판사의 할인 행사 경쟁에 관심 없는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살려고 찜을 해둔 책을 미리 사뒀다. 다만, 지름신의 유혹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책을 많이 사 놓고, 안 읽은 채 서가에 그냥 방치한다면 자칫 돈 낭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다 해도 오늘은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마음으로 지름신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절제한다. 내일 도서정가제가 도입해도 오늘은 책을 읽겠다는 마음으로 예전에 사 놓은 책을 읽거나 책을 살 것이다. 아니면 좋은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헌책방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지난주부터 반값 할인이 적용되는 책 중에 무얼 살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아직 월급을 받는 경제적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데다가 모은 적립금 액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가끔 출판사 대형 창고에 진행되는 할인 판매 행사에 무려 책을 열권씩이나 사서 인증 사진을 올리는 애서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경제적 수준을 고려해서 분에 넘치지 않을 정도로 구매하는 것이 더 낫다. 영화 ‘아저씨’의 원빈의 명대사를 약간 변형해서 빌리자면 나는 오늘만 책 사는 놈이 아니다. 난 내일도 책 사는 놈이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 오래 두고 읽을 수 있는, 나중에 헌책방에 팔게 되는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출판사들의 반값 할인 판매 대열에 내가 처음으로 산 책은 토머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 세트(새물결, 2012년)다. 책이 나올 당시에 세트 가격이 무려 99000원으로 책정되어 독자들의 원성이 빗발쳤던 문제작이다. 새물결 출판사 반값 할인 이벤트 덕분에 현재 49500원으로 살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반값 할인이 적용되었다 해도 나처럼 이 책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49500원 정도면 반값 할인이 적용된 2만 원 가격의 책을 두 권이나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이보다 더 싸게 살 수 있는 책의 소식이 많아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두 권으로 된 책을 5만 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사는 것은 ‘호갱’에 가까운 구매일 것이다. 게다가 핀천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작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예전에 핀천의 명성을 독서 고수들에게서 익히 들어본 터라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특히 『중력의 무지개』는 『V.』와 『제49호 품목의 경매』(민음사, 2007년)와 함께 피터 박스올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번 기회에 핀천의 작품 세계에 겁 없이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독서 고수 중에 핀천의 소설을 읽은 분이 있다. 그분은 민음사에 출판되어 현재까지 고가로 거래되는 초 레어템 『V.』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핀천의 작품 세계에 익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핀천을 이해하려면 그의 작품을 연구한 학술논문도 읽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핀천은 돈 드릴로, 코맥 매카시, 필립 로스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을 이끌고 있는 4대 작가로 거론되고,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언급될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독자가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작가다. J.D. 샐린저처럼 핀천도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꺼린다. 뉴욕에 사는 것으로 추정될 뿐 어디에 사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고,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고 사진 촬영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성은 이미 동료, 후배 작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으며 (작품의 난해성으로 인해 호불호의 평가가 있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중력의 무지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200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핀천도 못 받은 노벨상을 본인이 받게 된 것이 우습다고 말할 정도다. 읽기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진 『중력의 무지개』가 전미도서상을 받았고, 퓰리처 상 수상자로 선정될 뻔했으니 어마어마한 이력을 가진 작품이다.

 

핀천이 비밀로 가득한 은둔 작가라서 대중의 이목이 쏠리는 노벨상을 받을 확률은 희박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적중률 높은 세계의 도박사들도 100% 맞추기 어려워하는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다. 수상 유력 확률이 너무 낮은 핀천이 절대로 노벨상을 받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파트릭 모다이노처럼 깜짝 수상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력의 무지개』를 구입했으니 핀천의 문학 세계를 믿고 독서를 할 생각이다.

 

핀천의 작품을 발표 연도순으로 읽고 있다. 핀천의 초기작을 모은 단편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 2014년)으로 시작해서 『제49호 품목의 경매』『중력의 무지개』 순으로 읽을 예정이다.  『V.』는 핀천의 첫 번째 장편인데 몇 년 전부터 민음사에서 다시 번역 출간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현재 깜깜무소식이다. 『V.』는 학원사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는데 두 책 다 비싼 가격으로 온라인 중고샵에 나오고 있다. 『V.』 재출간 소식을 믿고 레어템을 사지 않았는데 좀 더 기다려야 봐야 할 것 같다.

 

 

 

 

 

 

 

 

 

 

 

 

 

 

 

 

 

 

 

 

 

 

 

 

 

(장편)
V. (1963년)
제49호 품목의 경매 ※ The Crying of Lot 49 (1966년)
중력의 무지개 ※ Gravity's Rainbow (1973년)

 

 

 

 

 

 

 

 

 

 

 

 

 

 

(단편)
이슬비 ※ The Small Rain (1959년)
로우 랜드 ※ Low-lands (1960년)
엔트로피 ※ Entropy (1960년)
언더 더 로즈 ※ Under the Rose (1961년)
은밀한 통합 ※ The Secret Integration (1964년)

 

 

출판사는 『중력의 무지개』 번역 기간과 비용에 상당액이 투자되었고, 작가 지명도에 비해 대중성이 적다고 판단해 700부만 인쇄했다고 밝혔다. 700부 한정판으로 나왔는데 아마도 구매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가격이 아니었다면 한정 인쇄본이 동났을지도 모른다. 핀천이 국내에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마니아 독자는 꽤 있다. 많은 노력을 들어간 책을 대중성이 낮다고 자인하는 출판사의 변은 ‘이 책은 많이 팔지 못할 것이다’라고 책을 팔기 전부터 백기를 드는 꼴이다. 책을 많이 팔아서 생기는 수익도 중요하지만, 책의 가치를 독자에게 널리 알리려는 도전 정신이 없다면 출판사의 진정한 역할을 잊은 것과 같다. 출판사는 책을 수익이 되는 돈을 발굴하듯이 만들면 안 된다. 출판 여건이 어렵더라도 독자에게 떳떳하게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작가와 작품을 골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책’이 될 수 있다. 나 같은 내일도 책을 사는 놈을 위해서 출판사들은 도서정가제에 크게 위축되지 않았으면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11-16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1 16:23   좋아요 0 | URL
잘 안 읽혀도 천천히 읽어보세요. 서평 작성 기간이 짧은 게 흠이지만, 철학을 이해하려면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