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 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

 

 


지아비는 집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딸은 돌무덤이 되고 옥수수를 팔던 파리한 여인은 여승이 되었다. 속세의 인연을 끊는 마지막 장면이 처연하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에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난 때문에 가족을 잃고 여승이 되기까지의 일생을 서사적으로 잘 그려 내고 있다. 먼 그 시절에도 가족 해체의 슬픔이 있었다. 백석 시가 보여준 애잔한 정서는 일제 강점기 발붙일 곳 없이 떠돌아야 했던 유랑과 상실의 소산이지만 그 원천은 사실 시인된 자가 가진 원형적인 고독과 비애의 결과물이다.

 

이 시가 쓰인 시기는 일본의 착취와 억압이 심했다. 그때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식민지 현실에 희생당한 민족의 삶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시를 단순하게 보면 한 여인의 비극적인 인생사를 압축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힘겨운 현실 속에 좌절하는 우리나라 여성의 한(恨)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백석 시에 나오는 여승은 속세를 떠나도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을 것이다. 과부가 기구한 운명을 끝내기 위해 속세와의 단절을 결심하게 된 그녀의 사연을 불경처럼 서러워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여승이 된다는 것은 유교 이념이 강한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여성을 사회통합의 구성원으로 수렴되기 위해서는 만든 것이 삼종지도(三從之道)다. 유교 사회에서 여자는 어렸을 때 지아비를 쫓고, 출가해서 혼인하면 남편을 따라야 하며, 노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 이렇듯 조선의 여성들은 삼종지도를 숙명으로 여기며 자신의 욕망을 꾹꾹 봉인해야 했다. 과거 여성들에게 최고의 출세와 신분상승은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진 남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삼종지도의 숙명을 거스르거나 따르지 못한 여성은 국가가 강조하는 유교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하였다. 결국, 이들에게 억압과 차별의 시대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같은 곳이 바로 절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국가 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었다. 남성 사대부들이 혼인을 피하고 여승이 되는 여성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그래서 불교와 여성 둘 다 억압할 수 있는 제재와 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승이 되려는 여성이나 절에 다니는 부녀자에게 '실행죄'(失行)가 적용되었다. 여기서 '실행'이란 '성적인 방종'이라는 의미가 있다. 조선 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에 보면 여승이 되어 절에 들어가는 여성은 절개를 잃은 것으로 해석했다. 심지어 중이 과부의 집에 출입하거나 만나는 것조차도 실행의 사례로 봤다. 당시 관료들과 사대부들의 기본적인 사고가 이러했다. 절이 문란한 풍습을 조장하고, 부녀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곳이다. 그곳에 출입을 잦거나 여승이 되는 여자는 여성의 정절을 해치는 범죄로 바라봤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백석 시에 나오는 여승은 과거에 어떤 남편의 아내이자 어린 딸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녀는 과부가 되었다. 평생 수절하면서 인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원망에 가을밤 같이 차게 울어야 했다. 가난한 생활 그리고 과부를 향한 차별과 편견 어린 시선은 그녀가 짊어져야 할 이중고였다. 그나마 유일한 핏줄인 딸마저 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냈다. 모든 것을 상실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운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불가에 귀의한 여인. 그녀의 모습은 유교의 엄격한 도덕에 의해 억압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성들의 삶이기도 하다. 고달픈 조선 여성들의 삶을 알고 나서 오랜만에 백석 시를 읽으니까 나도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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