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의 역사 - 조선 지식인의 성 담론
이숙인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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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숙  「신부」  2007년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신부’)

 

 

여인이 불 켜진 방안에 혼자 앉아있고, 댓돌 위에 고무신이 한 켤레만 가지런히 놓여있다. 문틈으로 나와 있는 옷자락은 첫날밤을 앞두는 아리따운 신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신부는 평생을 그대로 앉아 있다. 먼 훗날 신랑의 손길이 닿자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

 

이 시를 읽으면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한 편의 전설과 같은 시 속에 외롭고 슬픈 신부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기다리다 한 줌 재가 된다는 것. 이 시 속에는 우리나라 옛날 여인들의 한(恨)이 있다.

 

수절을 미덕으로 삼았던 한국 여인의 애틋한 삶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이 시는 유교적 열녀의 이미지를 신화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조선 시대 여성의 정절(貞節)은 남성의 충절(忠節)과 더불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적 규범이자 인간적 덕목이었다.

 

농촌 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어귀나 도로 주변에서 문 모양의 나무 건축물들이 보호 울타리 속에 서 있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일 것이다. 이런 건축물이 '정려'(旌閭)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마을 입구나 집 앞에 세우는 문을 말한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 대해 국가에서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삼국시대에도 나오지만, 이를 정려와 같은 사회제도로 정비한 것은 조선 시대였다. 태조는 조선을 세워 왕이 된 다음, 충신이나 효자, 열녀의 행실을 널리 권장하고, 정려를 세워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각 고을 수령의 추천을 받아서 연초에 국가 차원에서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결정했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로 인정되면 그 집안사람들은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를 ‘복호’(復戶)라고 한다.

 

정려가 오늘날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를 가문의 영예로 여겨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려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구실을 했다. 가족윤리가 강조되는 5월에 정려는 전통 윤리의 상징으로 되새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정려가 가지는 의미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려를 통해 지키고자 했던 윤리들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기도 했다. 정려가 세워진 집안의 후손들은 알게 모르게 그와 같은 삶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특히 이러한 압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은 여성이었다. 정려가 내려진 인물 중 다수는 여성이었는데, 이는 남편에 대한 정절의 대가였다. 이는 평민이나 노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정절은 정려가 요구하는 여성이 지켜야 할 가장 우선적인 덕목이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사회적인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재혼한 여성의 자식은 벼슬길에 오르는데 제한을 받았다.

 

남녀 문제와 부부의 문제가 결합한 정절은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상호 개념이지만 조선에서는 여성 일방의 의무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소복을 입고 언제든 가슴에 찬 은장도를 꺼내 들 준비가 된 여인. 서정주의 시에 나오는 신부처럼 평생 한 남자, 즉 한 남편만을 섬기는 여인. 전란 통에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인. 그 연원을 따져보면 조선 시대 여성의 잔혹한 역사를 탄생시킨 내밀한 국가의 의도와 만나게 된다. 신하의 충절과 아내의 정절이 한 쌍을 이루는 유교적인 정치체제에서 정절은 가족을 유지하고 충절은 국가를 지탱하는 이념이었다. 즉 정절은 국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부부 사이의 개인적 도덕인 정절을 국가가 관리했다는 뜻이다. 이 시기 정절을 지킨 아내에게는 국가 차원의 보상이 이뤄졌고, 반대로 개가한 과부 등 ‘정절을 해친’ 아내는 국가가 나서서 분노하고 응징하기까지 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정절을 어긴 이른바 실행녀(失行女)의 남성 가족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관직 진입 자체가 어려웠다. ‘자녀안'(姿女案)이라 하여 양반 출신으로 부정한 짓을 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여성의 소행을 적어 그 자손의 관직 등용을 제한했다. 이러한 정절과 관련된 법과 제도는 국가 차원에서 정절 여성을 발굴하는 동시에 여성의 음란행위를 감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정절 이데올로기’는 순수혈통을 지켜내기 위해 여성들의 성을 구속하였고, 이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들에게는 유·무형의 가혹한 처벌이 주어졌다. 가부장적 사회의 잣대로 이분화한 순결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으로 재단한다. 우리는 후자에 속하는 여성에 대한 경멸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뭔가 당할 만했겠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심지어 가슴이 파인 상의에, 허벅지가 훤하게 드러나는 짧은 치마 같은 야한 느낌이 드는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식의 여성책임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오는 여성의 정조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여성이 열녀라는 타이틀을 받으면 그 여성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에도 영광이었다. 하지만,  한 여성이 여성으로 사는 삶을 희생하는 조건으로만 사회적 출세를, 그것도 다 늙은 다음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성 개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조선 시대를 절대적으로 지배한 유교라는 사상과 잦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조선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장벽 ‘정절 이데올로기’에 부딪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선 시대 여인들은 수천수만 명이 훨씬 넘게 존재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열녀의 죽음이 과연 그 시대에 타인에 의해 정당하게 칭송될 수 있는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역사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희생된 이름 없는 여인들의 넋을 기리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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