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로 장서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생각보다 작업이 오래간다. 하루 절반은 공무원 시험 준비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 외에 사람을 만나거나 독서를 하다 보니 장서목록 작성이 점점 뒷전으로 밀린다. 장서목록 작업이 아직 마무리 된 것도 아닌데도 이놈의 책 사재기 버릇은 여전하다. 선(先) 목록 추가, 후(後) 독서. 일단 구입한 책은 바로 목록에 추가하면 읽기 시작한다.
장서목록을 작성하면 꼭 그 책의 품절, 절판 상태도 기록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 품절, 절판된 것도 있다. 절판된 책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죽은 책은 그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의 간절한 염원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출간된 지 오래 되었고, 지금도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테디셀러는 천수를 누린다.
결국 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독자들의 관심이다. 독자들이 좋은 책을 알고, 입소문이나 독자(혹은 전문가)서평 덕분에 알려진다면 판매부수가 높아진다. 그러나 잘 나가던 책도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인해 판매가 멈춰질 수 있다. 출판사가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해 문을 닫게 되어 일찍 생을 마감하는 책도 있다. 책 중에 가장 수명이 짧은 것은 장르문학이다. 장르문학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독자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지만,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아직까지 출판시장에서 크게 기세를 펴지 못한다. 올해 과학소설 전문출판사 불새가 나온 지 1년도 채 못 되어 문을 닫은 소식은 국내 장르문학의 냉혹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소리 소문 없이 출판이 중단되는 책이다. 독자들의 관심 밖에서 밀려난 책은 조용히 절판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때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책도 절판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과거에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최근에 절판된 사실을 알고 나면 기분이 묘하다. 책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나 보다.
류시화 시인의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초판 1991년)은 2000년에 집계한, 10년 간(1989~1998년) 베스트셀러 순위에 가장 많이 올랐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에 문을 닫은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주간 베스트셀러에 무려 21회나 등장했다. 2001년에 100쇄 발간 기념으로 시낭송 CD도 나올 정도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시집이었다. 2008년에 재출간되었으나 현재 이 책마저도 절판되었다.
한 때 우리나라 도서시장에 ‘교양’ 키워드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지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독서를 통한 교양 함양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녘, 2001년)은 교양서적 붐을 타고 35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교양에 목마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양적 개념의 교양으로 치우친 내용 구성이 아쉽지만, 유럽의 역사, 문학, 예술, 철학과 성 담론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문명과 교양의 핵심을 압축해 서양지식에 입문하는 독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교양』이 품절된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2004년에 사진을 추가한 컬러판이 출간되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이다. 현재 유일하게 판매되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은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들녘, 2008년)뿐이다. 한 때 도서시장을 주름 잡았던 또 한 권의 책 그리고 저자가 이렇게 잊혀 간다.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2004년에 타계했다. 그의 타계 소식을 인터넷 뉴스 기사로 접한 것이 엊그제 된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예전에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도 서점에서 사라졌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H.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열린책들, 2011년)과 박정희 정권 시절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던 원로 언론인 김종철의 『폭력의 자유』(시사인북, 2013년)이다. 나온 지 5년도 채 넘기지 못한 채 품절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8기 신간 평가단, 『폭력의 자유』는 13기 신간 평가단 활동 첫 도서였다. 개인적으로 『폭력의 자유』 품절이 너무나도 아쉽다. 언론인을 희망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권력 앞에서 쩔쩔 매고, 진실에 눈 가리고 외면하는 언론의 모습은 여전한데 한국 언론의 어두운 역사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년)은 너무나도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난달에 출판사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마지막으로 반값도 아닌 53% 할인으로 판매되다가 11일에 절판되었다. 올해 안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오늘도 알라딘에 읽고 싶은 책을 검색하다가 절판 사실을 알고 ‘품절도서 의뢰센터’ 버튼을 눌러 본다. 이번에만 열여섯 번째. 야속하게도 왜 내가 읽고 싶거나 사고 싶은 책이 절판이란 말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수급 통보 메일이 오지 않는다. 이래서 책은 사고 봐야 한다. 살 생각만 해놓다가 절판되고 난 뒤에서야 사지 못하면 후회된다. 우리가 쉽게 사고 볼 수 있는 책도 세월 앞에 스테디셀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