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에 나온 문학과지성사판은 품절)

 

 

빛바랜 카프카의 흑백사진을 바라다보면 짧은 인생을 살다간 그의 철학적 고뇌와 성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고독하면서도 희망이 묻어 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만 같은 그의 큰 눈망울에서 따스한 정이 느껴진다. 사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때문에 소심하고 외롭고 저항성이 부족한 청년으로 자랐다. 이러한 환경 속에 자란 카프카는 매사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한 마리의 까마귀예요. 한 마리의 카프카죠. (중략) 인간들은 나를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봐요. 아무튼 나는 위험한 새요, 도둑이요, 까마귀예요. 그러나 가상에 불과하죠. 실제로 나는 빛나는 물건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번쩍이는 검은 날개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나는 재처럼 회색이에요. 돌들 사이로 사라지기를 동경하는 한 마리 까마귀예요.”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49쪽)

 

카프카란 체코 말로 까마귀라는 뜻이다. 카프카는 자신을 날개가 위축된 고독한 까마귀요, 위험한 존재로 스스로 규정했다. 결국 자신이 가장 무서운 고독인 것이다. 군중들 한가운데서 불안에 벌벌 떠는 존재. 선천적으로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카프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평생 동안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카프카와 끊임없이 자기 부정과 싸워야 했다. 카프카는 짧은 생애 동안 아주 격정적이고 강렬하게 살다가 까마귀처럼 파란 하늘로 재빠르게 날아갔다.

 

카프카가 고독한 까마귀라면 보들레르는 그야말로 고독한 알바트로스다. 알바트로스의 날갯짓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알바트로스에게 '신천옹'(信天翁)이라는 신선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신성시한다. 새 중의 새, 창공의 왕자. 큰 날개와 몸통 때문에 높은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새.

 

날아오르지 못한 알바트로스는 지상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새로 전락하게 된다. 도움닫기를 하지 않으면 날아오를 수 없는데다 바람을 타지 않으면 비행할 수도 없다. 어부들이 항해 중에 알바트로스를 발견하면 곧 태풍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알바트로스는 거친 바다의 폭풍 속을 넘나들고, 그를 향해 총알을 날리는 사냥꾼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가 펼치는 하얀 날개는 순수함의 상징이었다. 보들레르는 이 알바트로스를 신비주의의 표상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창공의 왕자도 때론 뱃사람들에게 잡힐 때가 있었다.

 

 

 

 

 

 

 

 

 

 

 

 

 

흔히 뱃사람들이 재미 삼아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이 한가한 항해의 길동무는
깊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를 따라간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
가엾게도 그 크고 흰 날개를
노처럼 옆구리에 질질 끄는구나.

 

날개 달린 이 나그네, 얼마나 서툴고 기가 죽었는가!
좀전만 해도 그렇게 멋있었던 것이, 어이 저리 우습고 흉한 꼴인가!
어떤 사람은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올리고,
어떤 사람은 절름절름 전에 하늘을 날던 병신을 흉내낸다!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를 닮아,
폭풍 속을 넘나들고 사수(射手)를 비웃건만,
땅 위, 야유 속에 내몰리니,
그 거창한 날개도 걷는 데 방해가 될 뿐.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들레르는 자신을 알바트로스에 비유했다. 그 또한 알바트로스처럼 폭풍 속을 넘나들고 싶었다. 폭풍은 시적 자유, 사상적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의 시와 사상은 뱃사람들(지상의 무식한 대중)에 의해 이해받지 못하고 조롱당하고 말았다. 거대 알바트로스도 선원에게 잡힌 신세면 고역을 면치 못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거대 날개를 질질 끌어야 하고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기도 한다. 고매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보들레르는 시인인 자신의 운명으로 치환했겠는가. 그래서 그는 불행했으며 단 하나의 시집만 남기고 지상에서 사라졌다.

 

시인의 존재가 그런 게 아닐까. 늘 시를 쓰다 보니 뭔가 제가 속한 세계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컸던 것 같다. 시인은 소수자라 할 수 있는데 소수자의 생각과 느낌으로 살다 보니까 아무래도 비극성을 늘 갖고 사는 것 같다. 어쩌면 보들레르는 카프카처럼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시인은 언제나 사회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고 연약해요. 때문에 시인은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죠. 시인에게 시인의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외침에 불과하죠. 예술가에게 예술은 고뇌예요. 이 고뇌를 통해서 예술가는 새로운 고뇌를 위해 자신을 해방하죠. 시인은 결코 거인이 아니고, 자신의 실존이라는 새장 속에 갇힌 약간 다양한 색깔을 지닌 새에 지나지 않아요.”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49쪽)

 

너무 남다르고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독을 감당할 줄 알았다. 지상에 유배된 카프카와 보들레르는 끝없는 야유와 모멸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날개가 위축된 프라하의 까마귀, 하늘을 날지 못하는 지상의 알바트로스가 느껴야 할 고독은 이해 받지 못한 불길한 예언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문학으로써 현실을 감내해 보려는 것, 그것이 문학의 위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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