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는 주인공이 동물이면서 글이 짧고 읽는 재미가 있다. 또한 삶에 대한 교훈도 들어 있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장르이다. 이야기 속 동물은 사람처럼, 혹은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행동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서는 인간 세상을 풍자한 주제가 많다. 우화는 그래서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만큼 글은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문학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우화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는 이솝이지만, 쇼펜하우어, 카프카 등 늘 ‘어려운 이야기’만 했을 법한 이들도 우화를 지었다. 특히 톨스토이는 자국인 러시아뿐 아니라 인도, 아랍 등에 전해 내려오는 각종 우화들을 엮어 우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짧은 이야기 속에 인간에 대한 통찰력과 혜안, 풍자와 해학까지 녹아 들어있는 우화의 매력을 당대 석학들도 외면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밖에 라 퐁텐 우화, 끄르일로프 우화도 알려졌는데 이 두 사람은 세계 각지에 흩어진 상태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솝 우화를 집대성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이솝 우화와 중복된 내용이 꽤 있다.
라 퐁텐은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고대 로마 문예에서 발견되는 감수성과 문학적 취향을 존중했다. 그래서 라 퐁텐 우화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문체가 특징이며 교훈을 강조하는 우화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라 퐁텐 우화집은 총 12권 24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6권은 1668년에, 7~11권은 1687년, 마지막 12권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694년에 완성되었다. 이 정도 삶의 이력만 보면 라 퐁텐은 우화집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남의 집에서 빌붙어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생전 루이 14세의 은총을 받은 명사였고, 부유한 후원자들 덕분에 편안하게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어쩌면 12권으로 구성된 우화집이 탄생한 것도 그런 무위도식의 삶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묘비명은 라 퐁텐의 삶을 그대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장(드 라 퐁텐)은 그가 왔던 것처럼 가버렸다.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많은 재물을 하찮게 여겼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잘 쓸 줄 알았다.
시간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실컷 잠자는 데,
나머지 절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썼으므로.
그를 지켜 본 친구나 후원자가 썼을법한 묘비명이다. 그들에 눈에는 라 퐁텐이 방탕하고 게으른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라 퐁텐은 시간을 잘 쓸 줄 알았다. 시간의 반은 분명 우화집을 정리하는데 썼을 테니까.
끄르일로프는 이솝, 라 퐁텐에 비하면 생소한 이름의 작가이다. 그러나 끄르일로프가 우화를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톨스토이의 우화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18세기 말 부패로 물들인 관료 사회 속에 점점 외면 받는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 끄르일로프는 당시 러시아의 부조리한 삶을 우화에 반영시켰다. 총 9권 198편으로 구성된 우화집은 교훈을 강조하기보다는 사회 비판 성향이 더욱 강하다.
라 퐁텐, 끄르일로프 이전에도 이솝 원작으로 알려진 우화는 15세기 인쇄술이 발달되면서 여러 가지 판본으로 만들어져 더욱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때 삽화가 등장한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에서 당시 출판된 우화들은 다양한 삽화가 곁들여졌다. 섬세한 풍경 묘사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그린 동물 모습을 비롯해 거친 밑그림 수준의 그림이나, 장식적 기교를 바탕으로 맵시 있게 그린 작품도 있다.
유명한 화가들도 우화 삽화 제작에 참여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이 귀스타브 도레와 마르크 샤갈, 그랑빌이 그린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는 라 퐁텐 우화 이외에도 『신곡』『돈 키호테』『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등 수많은 문학가들의 작품에 삽화를 제작해 명성을 얻었다. 샤갈은 1926~1927년에 라 퐁텐 우화를 소재로 100점의 구아슈 작품을 제작했는데 현재 전시되어 소개된 것은 불과 43점에 불과하다. 나머지 작품은 세계 대전을 겪는 과정에서 소실되거나 행방이 묘연하다.
황금부엉이 출판사에서 2권으로 나온 라 퐁텐 우화집은 도레의 삽화를 실었다. 시공사 라 퐁텐 우화집의 삽화는 구제라는 판화가가 1834년에 그린 것이다. 샤갈의 삽화를 볼 수 있는 라 퐁텐 우화(출판사는 지엔씨미디어)는 품절되었다.
(위) 구제의 삽화 / (아래) 도레의 삽화
이솝 우화라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바로 ‘개미와 베짱이’다. 이 이야기 덕분에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베짱이는 무위도식을 대표하는 곤충으로 이미지가 굳혀졌다. 그런데 원전은 베짱이가 아니라 매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솝 우화가 전국 곳곳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진행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구술자에 의해서 달라진다. 매미에서 베짱이로 언제 탈바꿈했는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다.
1834년에 나온 라 퐁텐 우화에서 ‘매미와 개미’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구제의 삽화는 매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베짱이(얼핏 보면 메뚜기처럼 보인다)를 그려 넣었다. 도레의 삽화는 아예 베짱이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도레가 그린 ‘개미와 베짱이’ 삽화는 싸늘한 느낌이 감돈다. 베짱이는 개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애절하게 구걸한다기보다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눈밭 위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듯하다.
도레와 구제의 삽화는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나 곤충의 형태를 세밀하게 묘사한 반면 샤갈은 화려한 색채와 과장된 형태로 그렸다. 그래서 샤갈의 라 퐁텐 우화집이 출판되었을 당시만 해도 일부 비평가들은 고전주의적이면서도 교훈을 강조하는 우화 형식에 어울리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만 해도 텍스트와 삽화의 연관성을 중요시했으며 도레와 구제 또한 우화의 특성을 놓치지 않았다. ‘읽기’와 ‘보기’가 동시에 가능했다. 그러나 샤갈의 삽화는 ‘읽기’보다는 ‘보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은 교훈을 강조시키는 우화의 결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특정 장면을 부각시켰다. 눈으로 읽는 우화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우화로 변용시킨 것이다. 그래서 샤갈의 삽화는 텍스트만 떼어 놓고 보면 한 편의 멋진 그림이 된다.
(위) 구제의 삽화 / (아래) 샤갈의 삽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삽화가 ‘여자가 된 암고양이’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암고양이를 애지중지하게 키우던 남자는 그것의 매력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남자는 신에게 암고양이가 여자로 변신하기를 간절히 기도를 올렸는데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고양이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여자로 변했다. 여자가 된 암고양이는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처럼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와 고양이 여인은 잠결에 생쥐가 돗자리를 갉아먹는 소리를 들었다. 생쥐가 돌아다니는 것을 본 고양이 여인은 침대에 나와 바닥에 공격 자세를 취했다. 고양이가 생쥐를 공격하기 전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말이다. 아뿔사! 신은 실수했다. 몸은 변했으나 생쥐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양이의 습성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몸에 밴 천성이나 습관을 강조하고 있다. 구제는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삽화를 그렸다. 생쥐를 잡으려는 고양이 여인과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는 남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샤갈은 여자로 변신한 고양이의 존재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고양이 얼굴을 한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샤갈의 고양이 여인은 탁자에 앉아 팔을 기댄 채 요염한 눈빛으로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강렬한 붉은 색과 남색으로 그려진 고양이 여인의 치마는 숨기지 못한 암고양이의 야생적인 본능을 돋보이게 만든다.
외모의 결점을 외면하고 좋은 모습만 바라보려는 나르시시즘을 비판하는 ‘남자와 그의 모습’에서 샤갈은 물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르키소스의 익숙한 자세를 그대로 차용했다. 나르시스트의 얼굴은 누런 빛깔에 흉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전설 속에 나오는 괴물’과 같은 모습이다.
마지막에 소개할 샤갈의 삽화는 ‘개미와 베짱이’ 다음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우화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과연 어떤 우화를 묘사했는지 한 번 맞춰보시라.
우화는 어린이용 이야기가 아니다. 세월이 흘러도 바라지 않는 해학과 풍자는 어른 세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도덕적 감화를 위한 우화의 시대는 지났다. 우화집의 삽화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여러 양식과 분위기의 삽화를 보면 이솝 우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되고 표현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없는 우화는 허전해 보인다. 그런 황량하기 쉬운 짧은 글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삽화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