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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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관심이 있어 대중을 위한 과학교양 서적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본격적으로 과학 지식을 공략해 보겠다는 생각이 솟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때 용감무쌍하게 전공 서적을 들춰보았다간 내 인생과는 아무 관련 없는 수식과 용어들에 다시 기가 죽고 목표를 수정하게 된다.

 

자연과학과 공학의 기초가 되는 물리학이 과학기술 발전에 결정적으로 공헌했음에도 학생들에게 기피대상이 되고 있다. 아마도 어렵고 재미없다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물리학자들에게 왜 물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어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물리가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물리학은 분명히 재미있는 학문인데 우리가 그것을 재미없게 혹은 어렵게만 대해 온 때문이지는 않는가?

 

아인슈타인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잘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적인 과학 천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들도 1960년대 초에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이곳 학부생들이라면 수학, 과학 분야에서 미국 최고의 영재들임에 틀림없는데 왜 물리공부를 힘들어 하는가,고민하다가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양자전자기학을 완성한 뛰어난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게 일반물리학 강의를 맡겨보기로 한 것이다.

 

파인만의 강의는 명강의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가장 큰 특징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주제라도 완전히 자신의 언어로 소화한 후에 전달하기에 항상 새로운 영감과 깨달음의 감동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강의철학을 이렇게 얘기한다.

 

“우선 당신이 강의하는 내용을 학생들이 왜 배워야하는지, 그 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라. 일단 이것이 분명해지면 강의 방법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머리말에서, 23쪽)

 

1961년부터 2년간 행해진 파인만의 일반물리 강의는 대히트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강의를 특히 즐긴 사람들은 정식으로 수강신청을 한 학부 신입생들이 아니라 대학원생과 교수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파인만 강의의 특징이 아주 잘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파인만 자신이 대학 학부 1학년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의 일부라 그다지 어렵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현상으로 물리 법칙을 설명하는 파인만 특유의 접근법이 녹아 들어있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심오한 물리학 이론을 유추해낸다. 원자에서 시작해서 기초 물리학, 물리학과 다른 과학과의 관계, 그리고 에너지, 중력, 양자적 행동 등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를 소개한다.

 

예를 들면 소금이 물에 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파인만을 따라 분자의 시야에서 이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주변의 다양한 현상을 ‘진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느낄 수 있다. 나트륨과 염소가 전기력으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던 소금의 결정은 물에 들어가면 붕괴하기 시작한다. 물에서 산소의 음이온과 수소의 양이온들이 나트륨과 염소이온을 각각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 극성을 가진 이온들이 서로 끌어당기면서 소금 결정이 붕괴돼 물에 녹는다. 하지만 소금의 일부 원자가 결정으로부터 붕괴되는 동시에 다른 원자들은 물속에서 결정으로 되돌아온다. 소금이 물에 녹을 지, 결정이 생길 지는 물과 소금의 양에 달려있다.

 

양자역학은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체험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파인만은 전자를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볼 수 있는 실험을 통해 양자적 행동의 미스터리를 설명한다. 틈새를 통과하는 전자는 총알과 같은 입자처럼 덩어리로 벽에 도달하지만, 특정 위치에 도달할 확률은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전자는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결론이 그래서 나온다. 이러한 모순투성이 이론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기둥 삼아 유지되고 있다. 우리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불확정성 원리’를, 전자의 운동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여기서 사수의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발사되는 총알을 쏜다. 2개의 철판구멍을 두고 난사되는 총알의 탄착점과 역시 2개의 구멍으로 생겨나는 물결의 간섭, 우리가 ‘입자’라고 알고 있는 전자는 어떤 운동 모델을 따를 것인가. 오늘날 수많은 물리 입문서가 모방해 낯설지 않은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재기 넘친 말투로 생생하게 전하는 설명은 듣는 이에게 분명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심리학 등과 같이 물리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다른 과학들을 설명하는 제3강은 특히 흥미롭다. 아니, 이 책에서 제3강의 내용이 제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리학과 다른 과학에 대한 개념을 매우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읽을 때 제3강부터 먼저 읽어도 좋다. 여기에서 파인만은 천문학과 물리학의 관계를 밝히면서 시인들의 게으름과 무관심을 질타한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목성을 쉽게 의인화하면서도 목성이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구형의 회전체라는 뻔한 사실 앞에서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이렇게 한정된 소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들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가?" (123쪽)

 

과학적인 발견의 축적 때문에 별의 아름다움이 상실되고 있다는 시인들의 불평불만에 대해 파인만은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새로이 알려진 사실이 오히려 지적이고 서정적인 풍요로움을 선사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물리학은 간단한 중력 법칙에 의해 깨끗하게 설명되며 중력 이론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상대성 이론’이 속 시원하게 해결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의 물리학은 ‘맹목의 우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세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양자역학이 확률과 우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며 역정을 낸 것도 당연하다.

 

‘최첨단의 물리학은 한마디로 무식의 전당이다.’ 동료 교수들마저 어려운 과학을 쉽게 이해하는데 성공한 파인만마저도 과학의 한계를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풀어야 할 수수께끼 또한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가 강의를 한 지도 40년이 흘렀다. 소립자의 계열에 질서를 세운 ‘쿼크’ 이론이나 ‘궁극의 이론’에 한발 다가섰다는 초끈 이론, M이론 등의 최신 내용은 이 책에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파인만이 소개한 물리 이야기는 우리 주위의 자연 현상이나 새로운 기기에 다양하게 적용되거나 세상을 작동하는 과정이다. 과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무엇이 핵심이 되는지를 아는 능력이 전체를 보는 눈이며,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자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가 숨겨둔 비밀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지적 떨림과 즐거움은 언제까지나 가장 ‘Fine(멋진)’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인만이 남긴 'Fine'(좋은)강의록 덕분에 과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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