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자식 더러운 똥오줌도 / 그대 마음 하나도 거리낌 없는데 / 늙으신 부모님 눈물과 침 떨어지면 / 그대는 도리어 미워하고 싫어하네 / 그대의 몸뚱어리 어디에서 나왔는가 / 아버님의 정기와 어머님의 피라네 / 그대여 늙어가는 부모님을 공경하오 / 젊으실 때 그대 위해 살과 뼈가 닳으셨소.” (『명심보감』 ‘팔반가팔수’(八反歌八首) 중 제3절)
Scene #1 우리는 유태인입니까?
유태인은 결혼하면 부모와 한집에 살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편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속담에도 “고부가 한집에서 사는 것은 고양이 두 마리를 한 가방 속에 넣어 기르는 것과 같다”는 얘기가 있다. “아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운아였다. 장모가 없었기 때문이다”는 속담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젊어서는 건강함을, 늙어선 백발을 자랑하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백발은 자랑거리가 못된다. 이제 자랑할 수가 없다. 많은 어버이는 자식들에게 벌써 천덕꾸러기가 돼 있다. 효(孝)가 미덕이니 하는 말은 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할 세상이 다 됐다.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최근 20, 30대 미혼 남녀 회원 천여 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여자의 90%, 남자의 40% 이상은 시부모(부모)와 같이 살지 않겠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모시고 살겠다’는 여자와 남자는 각각 4%와 10% 이상이었다. 만약 그들의 부모에게 거꾸로 똑같은 질문을 해봤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오늘은 어버이날. 붉은 카네이션 물결로 가득하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요란함은 이 나라가 마치 어른들의 천국임을 확인이라도 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땅의 어른과 어버이는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그 많은 자식들이 하루 동안의 ‘효도 대열’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Scene #2 효란 무엇입니까?
<논어>에서 공자는 대화를 통해 효의 본질을 명료하게 가르쳐주고는 했다. 위정(爲政)편의 이 대화는 짧지만 공자의 성품을 잘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맹무백이라는 사람은 노(魯)나라 대부(大父)의 맏아들이었는데 마음이 착했다. 그가 “효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부모는 오로지 자식의 질병을 근심한다”(父母 唯氣疾之憂)라고 대답했다. 맹무백은 건강이 좋지 않았나 보다. 그렇기에 건강 때문에 혹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 우려가 있으므로 몸을 건강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효라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효자라 해도 질병에 걸릴 수가 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질병에 걸릴까 염려하는 걱정만은 어쩔 수 없이 남겨두되 다른 걱정은 일절 끼쳐서는 안 된다. 혹 기질을 부모의 질병으로 풀이한다면 이 구절은 효행이란 자식이 부모가 병에 걸리지 않기만을 늘 걱정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공자가 살고 있었을 때나 지금이나 부모에게 효를 행할 때 진정 사랑하는 마음 없이 행하는 가식적인 예가 그때도 지금과 같았던 걸까. 위정편에 보면 견마지양(犬馬之養)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의 효라는 것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개나 말 따위도 모두 (서로를) 먹여주고 있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느냐?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53쪽)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집에서 기르는 개나 말처럼 부양하는 정도의 물질적인 것으로 대신하니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요즈음은 맞벌이를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니 신혼부부가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도 직접 애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육아원에 맡기거나 장모나 시어머니가 키우는 예가 많다.
자기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바르게 가질 수 있겠는가.
효(孝)는 늙을 노(老)를 아들 자(子)가 업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이 유교의 도덕 사상의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우리나라의 도덕과 윤리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어 왔다.
<동몽선습>에서 말하기를 어버이는 인자하고, 자식은 효성스러우며, 임금은 의롭고, 신하는 충성스럽고, 남편은 온화하고, 아내는 순하며,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을 공경하며, 친구는 어짐으로 도와야 사람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어버이에게 효도를 한 후에야 임금에게 충성하고, 동생은 형에게 공손한 후에야 어른에게 공손스러우니 효가 가장 으뜸이라고 했다.
오늘날 삼강오륜에 한 가지라도 위배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이 삭막하고, 악랄스럽고, 이기적이고, 불효와 폐륜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Scene #3 진짜 탕자는 누구인가?
효는 시대와 종교와 사상을 가리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최고의 윤리규범으로 지켜져 왔다. 서양문명의 바탕이 되는 기독교는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고 있다. 십계명 중 앞에 네 개는 절대자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연관된 것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관계를 규정한 것인데 인간관계의 규범에서 제일 첫 번째를 효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살아계신 부모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찌 섬기겠느냐 하는 것이며 부모님이 살아 계신 동안을 정성껏 받들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공자가 맹무백에게 강조한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탕자의 귀환’에 나오는 아버지가 있다.
큰 아들은 신실했고 작은 아들은 제멋대로였다. 하루는 작은 아들이 자기 인생을 살겠다고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당겨 달란다. 기어이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 나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탕자라고 불렀다. 큰 아들은 달랐다. 아버지의 뜻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겨진 일에 충실했다.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고 칭찬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거의 굶어죽을 상황에 처해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 집에는 종들조차 풍족히 먹고 사는데 자기는 지금 여기서 굶어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아들은 즉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염치없지만 아버지에게 자기를 품꾼으로 써 달라고 하면 그 정도는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8~1669년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단 하룻밤도 깊은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의 일상이 되었다. 얼마 후에 드디어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몰골은 영락없는 거지지만 아버지는 단번에 아들을 알아보았다.
그런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그저 집에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아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인다.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큰 아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심술이 나서 아버지에게 따진다. 아버지는 안타까워하며 간곡히 이른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1~32)
같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큰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는 동생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동생을 비난하고 정죄했다. 그러나 큰 아들이 놓친 것이 있다.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는 점이다. 작은 아들은 한 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큰 아들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만큼 했다'는 생각에 여전히 은혜가 뭔지 몰랐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은혜로 대할 줄 모르는 사람이란 점이다. 큰아들이야말로 집안의 탕자였다. 그는 못난 자식을 근심하고 따뜻하게 품을 줄 아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Scene #4 효는 만유 공통의 윤리
부모님을 위하여 하는 일을 귀찮게 여기거나 짜증을 내면서 효도를 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은혜를 생각하면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실천하는 효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모에게 큰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 효의 본질이다. 송나라 때 소옹(邵雍)은 큰 추위, 큰 더위, 큰 바람, 큰 비가 있으면 집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게으르거나 자기 몸을 아껴 그런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 몸을 공경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생전에는 이러한 것을 모르다가 제 자신이 애를 키워보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다 못한 죄를 느끼게 된다. 부모님에 대한 공경과 보은은 정성이 깃들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이 있어야 한다.
세월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불효자는 화장터엘 가보라고 했다. 거기에 가면 제 아무리 불효자식도 효자가 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불구덩이 속으로 어버이를 들여보내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 그리고 잠시 뒤 한줌의 재로 말없이 다가온 망자(亡者)를 맞이하는 숙연한 모습들. 그 시작과 끝에서 눈물범벅이 된 울부짖음.
만유 공통의 윤리이며 도덕률인 효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취급 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한 고대의 윤리규범을 현대인들이 따라가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그대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전통적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 없는 미래가 없듯이 우리의 현실은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예절과 풍속은 효를 바탕으로 생활 양식화된 문화로 정착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가다듬고 회복시켜야 한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와 환경 속에서 사회적, 가정적 연대감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되어 소외감마저 들어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장래를 위해서 가정이나 학교, 나아가 사회, 국가 교육을 통하여 전통윤리인 효의 정신을 회복시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윤리적 병폐를 바로잡고 건전한 사회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노인은 늘어나고 어버이와 어른이 사라져가는 세상. 물론 지금은 ‘논어 시대’가 아니다. 부모 자식이 함께 사는 것이 만능도 아니다. 세태는 당연히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람 사는 이치와 근본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여기가 유태인의 나라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