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실로 ‘살아남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눈 한번 잘못 팔다가는 달리는 차바퀴에 남은 목숨을 바쳐야 하는 우리 처지다. 그 이름도 많은 질병, 대량 학살의 전쟁, 불의의 재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갈등. 이런 틈바구니에서 우리들은 정말 용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기에 앞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여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존귀한 목적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는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기 차례를 맞이할지 모를 인생이 아닌가. 살아남은 자인 우리는 채 못 살고 가 버린 이웃들의 몫까지도 대신 살아 주어야 한다. 나의 현 존재가 남은 자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느냐가 항시 조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은 용하게 살아 남았군요” 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다. 살아남은 자가 영하의 추위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화목에 거름을 묻어 준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살아남은 자들이다.
(법정,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발췌)
잠깐 햇살이 비치고 있지만 지금 한반도의 공기는 더없이 무겁고 흉흉하다. 누구나 지금 눈물에 젖은 먹장구름에 가위 눌린 채 무기력과 슬픔의 일상을 견디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면 그 사랑의 온도와 질감은 비보로 인하여 낮게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모든 생일잔치와 동창회와 회갑연들, 강의실과 식당과 지하철, 회식 이후의 노래방과 은밀한 사랑의 모텔조차도 팽목항의 슬픔에 엄청난 무게에 짓눌린 상황이다.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고 시를 읊었다. 살아있는 자의 기쁨 대신 슬픔을 노래했다. 우리는 강해서 살아남은 것일까?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일까? 표현하지 않지만 때로는 살아남은 것이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되고 비겁함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무기력과 공포, 답답함과 불안함.
하지만 운 좋게, 혹은 강해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늘한 마음으로 세월을 견디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비단 여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잊혀진다'는 사실에는 비애감이 있다. 영원히 잊혀진다는 건 그래서 겁나고 무서운 일이다. 어쩌면 살아남은 자의 진짜 슬픔은 먼 옛날의 일처럼 비극을 쉽게 잊어버리는 기억의 한계일 것이다.
살아 있음에 슬픔을 느꼈다면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주변 사람을 안아주고 보살필 수 있는 이 평범한 일상이 ‘사랑’이며 서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위로’다.
망자(亡者)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그 사람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일은 아프고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슬픔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 주변에 있는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다.
강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한다. 쓰러진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온기쯤은 남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