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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평점 :
선전(propaganda)이란 원래 '잘 설명해서 널리 알린다'란 의미의 중립적인 단어였다. 'PR의 아버지'로 불리는 저자는 자신을 PR전문가보다는 '선전가'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선전을 통해 일반 대중이 선량한 엘리트 집단의 안내를 받으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선전의 의미는 부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의 역사에서 선전은 피바람을 부르기 위한 일종의 물밑 작업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나치정권과 그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였다. 괴벨스의 선동을 발판으로 유대인을 학살하고 잇단 전쟁을 치른 독일은 혈육과 이웃사촌을 잃은 뒤로는 더 이상 선전을 신뢰하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전 세계인들 역시 이 부분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버네이스의 이상은 현실 세계와 달라도 한참이 달랐던 셈이다.
이런 인식이 발달하면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쉽게 정권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 예로 195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각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정권 홍보물인 '대한뉴스'를 틀었다. 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통제 아래 사람들은 얌전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영화가 끝나면 술자리 안줏감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어두운 시대에 대중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행동이었다.
버네이스는 선전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확언한다. 아무리 까다롭고 냉소적으로 일관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반응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특히 선전의 일부인 기업 광고가 넘치는 세상에서 선전의 역할은 과거에 비해 더욱 교묘하고 절대적이다. 음식을 필요로 하고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지도자를 따르려는 인간의 본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선전의 효과는 유효하다.
물론, 이 책에는 어떤 용어나 행위가 아무리 가치중립적이더라도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80년이 지난 지금의 복잡한 사회경제구조에는 버네이스가 제시한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선전 전략이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론을 조직하고 이끄는 것은 설사 그 도구가 잘못 사용될 위험이 있을지라도 질서정연한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어느 분야든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달성하려면 선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현대의 선전은 기업이나 사상 또는 집단과 대중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건을 새로 만들거나 일정한 방향으로 끼워 맞추려는 일관된 노력이다. 대중은 선전을 통해 변화와 진보에 길들여진다. 선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선전은 생산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무질서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현대적 도구라는 점을 직시한다. 이러한 선전을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활용해야 할 책무는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있다.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 결국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소수 지식인들의 활발한 선전 활동에 달려 있다.
선전에 기만당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렇다고 믿지 않는 역설. 버네이스의 시대로부터 80여년이 흐른 지금, 달라진 것은 과연 무엇일까. 연일 신문과 방송, 인터넷을 도배하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선전과 선전 아닌 것을 구별해 낼 재간이 없는 대중은 힘 있는 정부와 기업이 설파하는 교묘한 선전 논리를 곧이곧대로 쉽게 믿어버리고 만다. 소수의 지배 권력은 끊임없이 여론을 조작하고 자신들이 신봉하는 이념과 정책을 받아들이도록 대중을 압박한다. 80여 년 전 버네이스의 자신감은 현대로 올수록 더욱 유효해지는 불편한 탁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