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은 감정이라는 액체에 사려분별력이 떠다니는 용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동시에 작용하는 영혼의 샘이랄까. ‘센스(Sense)’라는 말이 그렇다. 이 말이 형용사로 바뀌면 가슴으로 느끼는 ‘민감한(sensitive)’이라는 뜻과 머리로 생각하는 ‘영민한(sensible)’이라는 의미로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 마음은 이에 더하여 영혼(spirit)까지 담고 있는 듯하다.

 

칸트에 따르면 진리의 인식은 감성과 오성(悟性, 사고능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주변의 다양하고 무질서한 감각자료(sense data)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질료(質料)’를 내 주관기능인 ‘형식’이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여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이 ‘인식’되고 ‘존재’하게 된다. 순수이성을 선험적 오성이라 부르며 이 오성에 의해 우리는 밖에 있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했다. 이 명제가 가능하려면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식하므로 생각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인식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의 숫자, 양, 인과관계를 설정하거나 현상을 종합하며, 공간이나 시간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칸트와 같이 순수이성의 혜안을 갖지 못한 나도 청결한 마음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볼 때는 나름대로의 이치랄까, 그런 걸 터득하기도 한다. 마음이 탁해졌을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가 캄캄하게 느껴질 때는, 고교 2학년 때이던가, 복잡한 고등수학문제를 풀고 이해했을 때의 어둠에서 빛을 본 듯한 경험을 떠올리곤 한다.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수식이라도 그 원리를 깨쳤을 때는 그것은 매우 쉬운 보편적인 것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나 꽤 복잡한 경제문제도 깨끗한 마음의 창에는 굴절되지 않고 올바로 비춰지는 법이다. 이기적 욕망이랄지, 편견이랄지, 증오랄지, 그런 것들이 오물이 되어 마음을 뒤덮을 때는 보편적이지도 못하고, 상식적이지도 못하는 생각과 판단을 하게도 된다.

 

우리 사회에 불신이 만연하는 것은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개개인이 자신도 믿지 못하니 남도 믿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무슨 사회문제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정치인, 고위 공직자, 기업인과 종교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불신하는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 결과를 내놓은 걸 보면서 그들을 지도층으로 선출했거나 묵인한 장삼이사(張三李四)는 그럼 스스로를 정의롭고 정직한 인간으로 치부하는지 의심스럽다. ‘인간의 행위란 결과적으로 이기심과 그로 인한 위선에서 비롯된다’고 17세기 프랑스의 잠언작가 라 로슈푸코가 말한 대로 사람들은 가면을 쓴 채 목소리를 높이며 뭘 갈취코자 가면 뒤의 눈을 두리번거리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옷가지들은 더러워지면 깨끗이 세탁하여 입는다. 오늘날엔 빨랫감에 대한 방망이질 대신에 그냥 주기적으로 전기세탁기에 집어넣어 세탁한다. 더러운 때가 빠지는 걸 손수 보지 못해서 그런지 지난날보다도 마음의 때를 벗기는 데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혼탁하고 불공정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음을 정화하는 빨래방망이에 의한 성찰의 아픔을 스스로 겪어야 한다. 옛날 마을 건너 호젓한 개울가에 앉아 빨랫감을 방망이질하는 아낙들처럼 세파에 시달려 우리 마음에 잔뜩 끼어있는 오물들을 종종 깨끗이 닦아내면 사회가 좀 더 정의롭고 공정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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