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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 이해인 기도시집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우리가 늘 기도의 명수, 사랑의 명수이길 바란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털어 놓기 힘든 어둡고 아프고 슬픈 이야기도 우리에겐 마음 놓고 쏟아놓으며 거듭거듭 기도를 부탁할 때가 많다. 많은 경우에 수녀는 늘 심부름 잘하는 세상의 천사이길 바라는 것 같다.”
시인이 이 책의 서문에서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수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흔히 ‘수녀’하면 떠오르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이미지가 짐스럽고 무거울 때도 있겠지만, 그들이 바치는 신에 대한 사랑만큼 인간에 대한 사랑도 넘쳐나길 바라는 것이 바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 시집은 수도자로 자신을 봉사와 헌신 속에 던진 시인이 세상에서 느끼는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아름다운 시어들로 표현하였다. 이 시집에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내적 고민과 번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수도자적 태도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단상들도 아름다운 시어 속에 담겨 드러난다.
풀잎처럼 내 안에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으며
욕심과 마음을 모르는
작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행복한 나라를 꿈꾸어본다
작은 것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게 심어주신
나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내게 처음으로 작은 미소를 건네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가장 겸허한 친구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 「작은 노래」중에서 -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풀잎처럼 자신 안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는 것은 단지 수녀에게만 부여되는 짐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바로 겸손이고, 욕심과 미움을 버리는 것이다. 이 시집이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기도 시집이 아닌 대중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자세 때문이다.
내일은
나에게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지.
사람들에겐
해지기 전에
한 톨 마음도
남겨두지 말아야지.
찾아오는 이들에겐
항상 처음인 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야지.
잠은 줄이고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늘 결심만 하다
끝나는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또
하루가 가고
한숨 쉬는 어리석음.
- 「후회」-
그녀가 하는 삶의 고민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같이 결심은 많이 하고 이루지 못하여 후회하는 마음, 행복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찾아 헤매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는 행복은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어리석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후회와 미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 속에는 그 고민과 성찰을 통한 발전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내적 고뇌를 사랑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줄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정신적 성숙과 순수성을 느끼게 하고 그녀를 닮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 「풀꽃의 노래」중에서 -
자그마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기쁨을 찾는 소박한 삶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풀꽃처럼, 조개처럼, 바람처럼, 노래처럼 작은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얼마나 많이 잊고 바쁘게만 달려 왔는지...
이 시집을 읽다 보면 이러한 반성의 마음과 함께 자신을 최대한 낮추었을 때에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시 한 편과 함께 자연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소박한 마음 한 자락을 얻는다면, 도시의 복잡하고 답답한 일상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