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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과학 SE (2disc) - 일반케이스
미셸 공드리 감독,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Scene #1 한 남자의 판타지 보고서
펠트 천으로 만들어진 하얀 배 속에 나무들이 자라고 역시 펠트 천으로 만들어진 말을 탄 두 남녀가 그 배로 뛰어든다. 남자의 얼굴엔 종이로 만들어진 커다란 당나귀 귀가 붙어 있고, 푸른색과 하얀색 셀로판지의 물결이 뱃전에 부딪힌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만들었을 법한 어설프지만 상상력 넘치는 소품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골판지, 색종이, 가위, 풀만 있어도 아이들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던가.
아이들의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덜 자란 어른 이야기를 미셸 공드리 감독이 영화《수면의 과학》에 담았다. 침대 광고의 카피처럼 느껴지는 영화 제목은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했던 주인공 스테판이 써 내려가는 판타지에 대한 보고서라고 하면 적당할 듯싶다.
미셸 공드리는 제목도 독특한 《수면의 과학》에서 사랑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설렘과 떨림이 시작되고 미세한 통증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때. 여전히 꿈과 현실은 경계를 잃지만 사랑의 면면은 그럴수록 또렷해진다.
Scene #2 꿈과 현실이 뒤섞인 멜로드라마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스페인 청년 스테판은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 뒤 어머니를 찾아 혈혈단신 파리로 온다. 어머니의 배려로 직장도 얻었지만 그는 발명가이자 화가인 그의 취향과 전혀 상관없는 달력 회사에서 기계적인 노동에 종사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옛집에 몸을 의탁한 그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소녀 스테파니를 만난다.
처음에는 그녀의 친구 조이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섬세하고 여린 스테파니의 호의에 스테판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의 머릿속은 그녀로 인해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스럽기로 말하자면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이다. 스테판은 정신분열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엉뚱한 행동과 말을 일삼아 그녀를 혼란에 빠트린다. 스테판과 스테파니의 로맨스는 이렇듯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스테판이 파리로 와서 직업을 구하고 스테파니를 처음 만나는 순간까지 드라마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진행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이렇다 할 전개를 보여주지도, 절정의 순간을 통해 이야기적 쾌감을 주지도 않는다. 공드리는 스테판과 스테파니가 머무는 현실 세계, 스테판의 뇌 속 세계, 스테판의 꿈이라는 세 개의 시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스테판의 의식 구조를 파헤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꿈 속 세계에서의 자기 정체성에 더 큰 편안함을 느끼는 주인공이 멀쩡한 의식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실수가 반복된다. 불안에 사로잡힌 스테판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테파니에게서 안락을 느낀다. 스테파니는 그 몽상가를 이해해주는 지구상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둘의 사랑은 마치 풀로 붙여 만든 종이인형처럼 소박하지만 동시에 상처받기도 쉽다.
그는 여자에게 고백 후 거절이 무서워 현실이 아닌 꿈에서 시뮬레이션을 하고, 현실에서 절망의 골을 느끼는 소심함을 지녔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은 한결같은 순진무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에서 감독은 스테판을 통해 꿈과 현실의 혼재를 멜로드라마라는 영화적 형식을 가미하여 그의 뛰어난 감각으로 섞어낸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 교집합적인 성격은 장자의 '호접몽'에서 볼 수 있는 허무함보다는 사랑과 상상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도파민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사실 인간이 태어나 성인으로 커간다는 것은 각종 규율 속에서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선악의 개념 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눈에 몇 겹의 필터를 끼우게 됨을 뜻한다. 교육, 종교, 노동 등의 시스템은 사회화를 볼모로 권력을 차지하고 그 조직 논리에 따르지 못하는 자들을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주인공 스테판은 광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때 묻지 않은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충만한 그에게 달력 만드는 회사에서 식자를 붙이는 단순 노동을 반복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아름다운 그림 대신 지구촌에 일어난 각종 재앙을 소재로 달력의 그림을 구성한 스테판의 상상력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게끔 명명된 DNA를 가진 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광인은 과거 한때 천재성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됐지만, 중세 이후의 세상에선 그저 집단 감금의 대상일 뿐으로 운명이 조정됐다고 미셸 푸코도 지적하지 않았던가.
Scene #3 소통의 통로, 사랑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일종의 장애를 지닌 인물들이며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 혹은 '오브제'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이나 오브제조차 불완전하다.
스테판의 경우 꿈과 현실을 혼재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잡다한 생각, 그날 보고 들었던 것, 온갖 감정, 과거의 추억과 뒤얽힌 오늘의 추억’이란 요소를 집어넣어 ‘꿈 스프’를 요리할 수 있는 공간 스테판 TV를 가지고 있다. 그 공간에서 스테판은 자기의 생각을 실현 시킬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할 수 있으며, 어떠한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단지 스테판에게만 유용하다는 것이 비극이며, 현실에서는 이러한 스테판이 발버둥치는 자기 세계 확장 노력이 무시되고, 제재 당한다는 것이다.
스테파니의 경우 어떤 일을 시작한 후 완성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지녔다. 그녀는 자신의 집 방 한 구석에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 한 욕구를 대리충족 시켜줄 수 있는 작은 인형들과 미니어처들을 만들어놓고 진열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대상화하려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완성을 보지 못 하는 그녀는 계속 새로운 것을 널어놓는 행위를 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이다. 완성되지 않은 소유물에 대한 숫자 늘이기는 스테파니에게 또 다른 욕구 불만의 요소가 된다.
이 둘의 이러한 심리적 부재나 결핍의 극복요소로 공드리가 제시하는 것은 ‘가치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로써 ‘사랑’이다.
이건 어떤 이에게 비춰지기엔 흔한 사랑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 흔하게 비춰질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소통과 공유가 없는 사랑의 무가치성에 대해 영화 틈틈이 이야기하면서 때로는 스테판이 때로는 스테파니가 되어 그가 창조해내는 상상력의 세계와 더불어 맛깔나게 요리해낸다.
Scene #4 ‘꿈’과 ‘현실’로 만들어 낸 사랑철학서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라는 사상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랑철학서’이다. 철학은 인간의 존재와 실재에 대해 고민하게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성과 감성이라는 도구를 인간은 사용해왔다. 하지만 공드리에게 있어서 그 도구는 ‘꿈’ 이라는 것이며, 그의 체계 잡힌 논리는 이미 필름에 튼튼하게 잡혀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누군가는 공드리의《이터널 선샤인》에 비해 탄탄하지 못한 구성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같은 주방장의 손에서 나온 다른 맛의 음식일 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굳이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더라도 두 시간 남짓 동화 속 세상에 빠져 있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스테판은 현 사회의 잣대로 가른다면 덜 떨어진 인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통해 기억에서 삭제되어 무의식에서만 꿈틀대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때 묻지 않은, 그러면서도 날렵했던 꿈의 모서리들이 깎여 나간 자리가 새삼 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