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회화의 혁명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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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과 학생들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

 

작년 2학기 때 수강했던 수업 중에 ‘서양미술사’라는 과목이 있다. 원래 전공은 행정학과인데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회화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본 전공과 전혀 다른 수업 분위기는 색다른 느낌을 받았고, 몇몇 회화과 학생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회화과 학생 특유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서양미술사’ 수업은 회화과 2학년 전공필수 과목이라서 수강생 중에는 11학번 2학년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교수가 수업 도중에 학생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매번 하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너희는 어떤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가?” 회화과 학생들이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먼저 하는 것이 전공교수와 일대일 상담이다. 상담을 통해 학생들의 진로를 알아볼 수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전업화가나 미술 관련 분야의 직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교수는 상담에 응하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이 질문을 한단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회화과 학생들의 답변은 비슷하다.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그리는 것’. 교수는 학생들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에 일침을 가한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여기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 현대미술이 빠르게 발전되는 시점에서 대상을 무조건 정확하게 그리려고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생각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시작된 근대미술

 

교수가 회화과 학생에게 던지는 이 간결한 질문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생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이 어떤 건지 묻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예술적 정체성 없이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표현할 수 없다. 만약에 이 회화과 학생들이 유행에 따르듯이 다른 화가 지망생들과 비슷한 표현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과거 화가들의 작품을 정확하게 모사하는데 그친다면 발전이 더디어질 것이고 전도유망한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창작이나 발상 면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간다면 회화과 학생들은 방대한 분량의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수단의 고정성이 강하면 예술의 신선미와 생기를 잃게 된다. 이것은 곧 ‘발전’이 아니라 ‘퇴행’이다.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면 여러 단계의 전환점을 기준으로 발전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마다 발전의 기준을 보는 관점이 차이가 있지만 근대서양미술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게오르크 슈미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회화 역사의 시작은 원근법, 명암, 신체적 비례 등의 정확성에 의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았던 중세 초기부터 보고 있다. 이때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표현으로 발전했다. 두 번째, 중세미술은 바야흐로 조토 디 본도네의 등장과 함께 현실의 묘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공간적, 해부학적 정확성이 강조되었다. 세 번째의 발전 단계는 이전 시기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대상을 보는 인식이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바로 정확성을 강조한 고전적 화풍을 완전히 탈피하여 화가의 개성적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미술로 도달하게 된다.

 

'근대미술'(Morden Art)의 정의 및 시기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다르게 구분되고 있지만 ‘예전’과 다른 ‘새로움’의 가치개념으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 회화방식에서 강조하는 표현의 정확성을 과감하게 버리는 진취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시기이다. 화가가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표현한다는 것은 근대미술 등장 이전 화가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고전적 회화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보함으로써 근대미술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근대회화의 시작은 도미에로부터

 

 

 

오노레 도미에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1850년경

 

 

근대미술의 시작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등장과 함게 소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게오르크 슈미트의 소개는 다르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의 등장을 시작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과거의 고전주의가 추구한 정형화된 이상이나 규범을 거부하고 오로지 눈으로 보고 경험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그리스 고대 문화 모방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미술과 비교해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그 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도미에가 사실주의 화파라고 해서 대상의 정확성을 추구한 건 아니다. 명암을 기조로 한 유동감과 높은 정신성을 지닌 표현을 통해 대상을 솔직 예리하게 관찰했다. 특히 대상을 시각적 영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대상을 고의로 왜곡시켜 그리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 기법을 이용해 화가의 진실된 감정을 캔버스에 표출하고 있다. 사물의 자연형태에 보다 주관적인 왜곡을 가하는 도미에의 그림은 충실한 재현에서 벗어나 형체와 비례가 파괴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한 창조성으로의 기대치를 높여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자장가 (룰랭 부인의 초상)』 1889년

 

 

도미에의 선구자적 회화 기법은 프랑스 파리로 홀로 건너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는 젊은 반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흐가 습작 시절에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도 오랜 모사와 독학 끝에 정확한 형태의 회화 묘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하게 된다. 대샹을 정확하게 그린다고해서 진실적 가치를 제대로 담아낸다고 볼 수 없다고 고흐는 확신했다.

 

"모든 아카데믹한 형태는 오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미에가 그런 형태를 그린다면, 그 비례는 아카데믹한 작가의 눈에는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테지. 하지만 그 형태야말로 살아있는 형태일 것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의미에서 정확한 형태를 그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부정확함을, 그러한 뒤틀림을. 그러한 현실의 변형과 수정을 습득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열망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거짓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진실보다 더 진실하지 않은가."  (p 58~59)

 

 

 

 

폴 고갱  『시장』 1892년

 

 

해부학상의 정확성을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실제처럼 공간감각을 구현하기 위한 원근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갱의 『시장』이라는 그림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캔버스 중앙에 있는 5명의 여인과 배경은 원근법에 의해 정확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다. 장식 그림처럼 인물과 배경이 평면적이다.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대상의 '이면'을 그려라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미술 작품에는 이러한 기법 상의 관례나 사회 통념을 초월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교감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미술 작품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에 회회과 학생 중에 서양미술사 공부의 중요성을 못 느낀 이가 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쓴 책을 권하고 싶다.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싶어하는 생각을 쫓는다면 자신만의 개성적인 표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대상의 '표면'만 똑같이 묘사하는 빈 껍데기 그림보다는 대상의 '이면'에 숨겨진 실제적 특성을 정확하게 포착한 진실된 그림이야말로 미술의 진정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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