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기괴물 물고기
르네 마그리트 『집합적 발명』 1953년
우리나라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60년대 초 어느 일간지가 상반신은 물고기, 하반신은 여자의 하체로 이루어진 괴상한 사진을 실었다. 사진은 '기어(奇魚) 발견!'이라는 제목과 함께 해외토픽난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에 웃지 못할 정정기사를 났다. '괴상한 물고기가 아니고 사진작업을 통해 조작한 포토 몽타주였다' 1960년대 신문의 인쇄 상태를 감안한다면 그 당시로서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괴상한 사진을 접한 신문 독자들 그리고 마그리트의 그림을 한 순간에 괴물 물고기로 만들어버린 신문기자까지도. 마그리트의 미술이 소개되지 않은 그 당시로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그리트는 서로 다른 개념의 사물이나 풍경을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의 기이한 풍경으로 바뀐다는 변증법적 방법론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의 미술은 상식의 세계를 뒤집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예술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익숙한 감각과 관습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생각하는' 화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이성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무능한 지식인들을 '초현실적'으로 비꼰다. 프랑스 지식층을 통칭해 '카르테지앙(cartésien)'이라고 한다. 이성과 합리성의 표상인 데카르트의 자손이라는 긍지도 되고 꽉 막힌 답답한 친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마그리트는 답답한 이성의 아성을 훨훨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의 곡예'를 선보임으로써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함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도 통쾌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엉뚱하고, 이상한 철학하기
튜바를 쓴 마그리트
(1960년 촬영, 사진출처: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p 16)
마그리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이상하다', '낯설다', '엉뚱하다' 등의 반응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그리트 특유의 그림 속 이미지들은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난해한 그림으로도 볼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일반적인 화가들과는 달리 관객들에게 일방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불친절하게(?)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할 것을 제안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그리트의 미술을 '철학'처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철학'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총합적 학문이다. 그림으로 표현한 마그리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을 해보자.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철학의 사상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마그리트의 낯선 이미지들 속에 숨겨진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철학을 공부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되고 깊은 사유와 통찰력을 배양할 수 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미술에서 요구하는 '철학'은 깊은 사유를 통해 이미지를 해석하기 위한 '돋보기'일 뿐이다. 돋보기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미세한 대상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 돋보기는 마그리트 미술의 반을 이루고 있는 사유의 영역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이다. 안 그래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판에 철학까지 공부한다면 머리만 아파질 수 있다. 오히려 철학과 마그리트, 둘 다 싫어하는 역효과만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그리트의 미술은 기존의 상식과 평범함을 거부하는 실제와 같은 '낯선 세계'를 지향한다. 마그리트가 구축한 이 '낯선 세계' 속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하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가끔은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엉뚱한 생각도 해봐야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중절모 대신 커다란 튜바를 쓴 마그리트처럼 직접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실천해봄으로써 그림 속에 숨겨진 그의 의중을 좀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낯설면서도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는 것. 마음만으로는 쉬운 일이지만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게 어렵다. 일탈적인 사고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상'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끔 조언을 해주는 책이 프랑스의 칼럼니스트 로제 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다. 이 책에는 총 101가지의 철학 체험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는 '체험'이라기보다는 '놀이'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철학 고유의 딱딱하고 진지함이 없을 정도로 '철학 도서' 같지 않는 '철학 도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사상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위대한 사상을 익히거나 철학자들이 지나온 생각의 길을 가보는 대신에 오로지 일상 속에서 '나'만의 철학을 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오줌 누면서 물 마시기', '공원묘지에서 달려보기', '방 안에서 동물이 되어보기', '소리를 줄인 채 TV 화면 보기', '상상으로 사람 죽이기'(!) 등 얼핏 제목만 보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말 엉뚱한 철학 체험들이다.
그러나 로제 폴 드르와가 제안하고 있는 이 101가지의 철학 놀이들은 마그리트의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창의적인 체험들이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낯설게 하기'를 이해하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엉뚱하지만 깊이 있는 철학 체험을 통해 뇌 속에 갇힌 생각을 해방시키고 단조로운 일상을 탈출하여 마그리트의 세계로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다.
철학 체험 #1 : 그림 속으로 빠져들기
『끝없는 정찰』 1963년
일반적으로 미술관에 오는 관객들의 역할은 액자 속에 고정된 이미지만 보는 게 전부다. 미술관에 전시된 수많은 그림들 모두 다 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저 도슨트(Dosent)의 설명대로 그림을 이해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와 비슷하게 그림으로 구현된 상상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들은 늘 당신과 같은 공간 속에 있다. 그리고 운이 좋을 경우, 당신은 갑자기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당신을 둘러싼 일상의 공간에 일종의 균열일 발생하면서 당신을 그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로제 폴 드르와 『일상에서 철학하기』p 228)
아무래도 일상의 공간에 균열을 만들어줄 수 있는 화가라면 단언 마그리트라고 말하고 싶다. 마그리트가 관객을 위해 열어주는 이 '균열'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다. 마그리트의 그림『끝없는 정찰』을 주목해보자.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친숙하게 등장하는 중절모 신사 두 명이 서 있다. 그런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땅이 아니라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는 하늘 위에 서 있다! 일반적인 관객이라면 그저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그림으로만 볼 것이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이 그림에서 관객들을 위해 은연중에 일상의 현실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균열'을 만들었다. 그림 속 두 명의 중절모 신사들처럼 하얀 구름이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한 번 들어가보자. 동시에 여러 개의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일상적인 사고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마그리트가 만들어 낸 낯선 세계로 가기 위한 균열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철학 체험 #2 : 풍경을 그림처럼 접어보기
『들판으로의 열쇠』 1936년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한 지점의 풍경을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 풍경의 '그림'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접어본다. 아니면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풍경의 장면을 '유리창'으로 생각하고, 과감하게 망치로 그 그림을 깨뜨려보자. 풍경은 산산히 부셔져 파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풍경의 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풍경을 종이와 유리창으로 만들 수 있는 주관적인 의식과 풍경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성된 객관적이면서도 실제인 세계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철학 체험 #3 : 낱말의 의미에 구멍 내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년
'낱말의 의미에 구멍을 낸다?', 언뜻 문장만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손에 쥐고 있는 익숙한 사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 사물의 이름을 몇 번 반복해서 불러본다. 시간이 지나면 실체적 대상인 사물과 그것을 뜻했던 낱말이 분리된다. 분리되는 순간,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를 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부르고 있는 사물의 이름은 진정한 실체를 가리고 있는 '낱말'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를 구성할 때 그에 상응하는 '그림'을 산출한다. 건축가가 떠올리는 청사진처럼,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떤 '대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름이 뜻을 갖는 것은 이름들 간의 논리적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다. 그래서 사물에 향한 시선과 인식은 본질적인 실체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하나의 파이프를 단순하게 그리고 바로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음으로써 이미지의 묘사 혹은 재현의 모든 과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사고의 혼란이 시작된다. 그림 속 파이프가 단순한 오브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잘못된 언어와 결합하면 이미지가 오히려 사물 그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마그리트는 회화를 통해 이미지와 단어를 별개로 봤으며 단어는 그 자체를 지칭하는 데만 소용된다고 생각했다. 낱말과 사물의 분리를 통해 일상에서 볼 수 없었던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마그리트처럼 삐딱하게 세상 보기
(왼쪽)『강간』 1934년
(오른쪽)『빛의 제국』1954년
잘 짜인 기획들을 망쳐버리고, 예상치 못한 사태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빗나가게 하라. 순응하지 말고 악착같이 이 사회를 역주행하라. (『일상에서 철학하기』p 96)
『일상에서 철학하기』에 소개된 철학 제험 중에 '광대처럼 삐닥하게 세상 보기'라는 것이 있다. 저자는 아예 대놓고 '미친 놈'처럼 행동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정도 '미친 놈'이 되라는 건 아니다. 반복된 일상이 만들어 낸 고정관념에 벗어나는 일상을 경험해보자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보통 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그림에 전통적으로 부여하는 회화의 덕목 즉, 원근법과 명암법, 구도, 색채, 질감 그리고 표현의 테크닉 같은 일반 회화의 범주를 거부했다. 덕분에 사실 같은 초현실적인 그림들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었다. 마그리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의 사상가인 조르주 바타유는 『강간』이라는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흥분해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여성의 얼굴에서 여성의 토르소가 있는 마그리트의 발상은 삐딱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지 않는 이상 쉽게 나오지 않는다. 여성의 나체를 바라보는 남성 화가와 관람자들의 은근한 욕망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얼굴의 진실을 몸으로 대체해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의 구현으로 완성했다. 마그리트의 대표작 『빛의 제국』에서 나타난 낯과 밤의 동시성은 밝은 낮과 어두운 밤으로 구분짓는 이분법적 허상을 깨뜨리고 있다. 마그리트의 아이코노클라즘(Iconoclasm, 상식 파괴)은 철저히 초현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이렇게 경이롭고 낯선 이미지를 구성했다.
J. 호이징가는 인간의 삶을 유희, 즉 놀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호이징가는 놀이의 조건을 제시했다. 호이징가가 말하는 '놀이
란 자발적 행위, 비일상적인 것,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에 규정되지 않은 공정한 것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해
(중략)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선보기 하루전에 홀딱 삭발을
비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야이야이야이야이야
할일이 쌓였을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
야이야이야이야이야
모두 원해 어딘가 도망칠 곳을 모두 원해
무언가 색다른 것을 모두 원해 모두 원해
- 자우림 '일탈' 중에서 -
'일탈' 노랫말에 담긴 발산 욕구는 낯설고도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표출 행위다. 굳이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 돈이 들 필요가 없다. 시간과 비용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는 '철학 놀이'를 통해 일상 속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족쇄를 풀어 삶을 즐기고 유연하게 볼 수 있는 여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