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무녀는 아폴로 신으로부터 자신의 손 안에 든 먼지만큼 헤아릴 수 없는 영생을 얻지만 영원한 청춘을 달라고 하는 것을 잊었다.  죽음 상태라고 할 수 없는 늙어 꼬부라진 무녀는 조롱(鳥籠)에 담겨 만인들로부터 영원한 조롱(嘲弄)의 대상이 되었다.   "죽고 싶어" ,  염세적인 느낌을 주는 이 문구는 T.S. 엘리엇의 유명한 <황무지>의 프롤로그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는 시구일 것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pp 46) -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은 이 찬란한 봄의 계절에, 현대인들은 죽은 목숨만을 이어 가고 있으니 그것은 잔인한 운명일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사월이 되어 봄비로 잠든 생명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좀 더 행복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행복한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이 움켜잡은 뿌리는 무엇이며, /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pp 48) -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시인의 의식은 다시 황무지로 이어지고 황무지의 구체적 이미지가 제시된다.  바그너의 가곡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3막 24절을 인용한 시구는 황무지의 황량한 모습을 통해 잠시나마 느꼈던 행복과 사랑의 기억들이 허무하게 만들게 되는 절망적인 느낌을 준다.

  

 

 막스 에른스트  <비온 뒤의 유럽>  1940~1942 

 

황무지는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불모의 땅이지만,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현대 문명에 갇혀 생명의 기운을 잃은 상태였다.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맞닥뜨린 문명의 막다른 골목에서 엘리엇은 서구인의 삶에 서린 ‘무한한 늙음’과 ‘죽음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함이었다.
 

 

 

 

티에폴로  <히아킨토스의 죽음>

 

일 년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서 (pp 50) -

 

무녀의 절망에는 아직 희망은 있다. 그녀는 죽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재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무리 신적 능력을 지닌 초월적 존재라도 죽음의 영역을 거스를 수가 없다.    

무녀에게 영생을 부여한 아폴론마저도 자신이 사랑했던 히아킨토스(Hyakintos)를 다시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아킨토스의 선혈로 물든 땅에 히아신스 꽃이 피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히아신스는 부활한 신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아폴론의 입장에서는 히아신스의 존재만으로도 죽은 히아킨토스의 부재를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일까?  아폴론은 히아신스의 꽃잎에 탄식의 소리 ‘아, 슬프다!’를 나타내는 ‘AIAI’ 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결국 아폴론에게 히아신스는 히아킨토스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  

이렇듯, 현대인들의 절망에는 희망이 없다. 그 황폐한 정신을 가지고 죽음을 피해 다닐 뿐, 재생의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등장하는 겨울에 따스함을 쫓아 남쪽으로 가는 유한계급의 사람, 종교적 신념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문명의 값진 유산을 허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류계층 속물,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성(性)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 방탕한 여인, 상업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장사꾼, 구원의 기사를 유혹해 위험에 빠뜨리는 거리의 여인 등 수많은 인물은 모두 황폐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으로 절망하지 않는, 정신적으로 죽은 자들.   즉 어떤 소생의 믿음도 인간의 생활에 중요함과 가치를 제공해 주지 못하며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비극적 상태이다.  

전쟁이 남기고 간 황폐함과 유혈의 황무지보다 더한 현대인의 정신적 불모 상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앞뒤 좌우를 아무리 살펴봐도 넓디 넓은 황무지 속에서 우리 현대인들은 행복의 도피처를 통해서 저주스러운 문명 속에서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 시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은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로 끝난다.  샨티는 산스크리트어로 평화를 기원하는 단어를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신은 사라지고 종교라는 허울만 남은 세상, 종교가 권력이 되고 기득권이 된 오늘날 종교의 얼굴은 황무지에 사는 불쌍한 현대인들의 구원이 되어주기는 커녕 인간의 정신을 더욱 황폐화된 현실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희망의 시대를 간절히 바라는 엘리엇의 종교적, 소망적 메시지가 더욱 절망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11-16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