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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서(序): 기 우
열자(列子)의 ‘천서편’이라는 내용에는 고대 중국의 기(杞) 나라 사람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기 나라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면 피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이를 본 친구는 그 사람이 너무 딱하게 여겨 ‘하늘은 기운이 가득 차서 이루어진 것이니 마땅히 떨어지지 않는다.’ 고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기 나라 사람은 친구의 말에 근심을 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 나라 사람의 걱정이라는 뜻의 ‘기우’(杞憂)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쓸데없거나 안 해도 될 걱정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Homo anxietas
사람들도 살다보면 기 나라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한 번쯤은 겪었을 것이다. 살면서 처음 비행기를 타본 사람에게는 재난영화처럼 비행기가 날다가 추락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하고, 외출을 하기 위해서 새로 산 옷을 입으려 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지 괜히 두근거리기도 한다. 심지어 기 나라 사람처럼 2012년에 지구 종말이 닥쳐오지 않을까 불안해하기도 한다. 사실 열거한 사례들 이외에도 현대인들은 살면서 크던 작던 많은 걱정을 한다. 그러나 걱정이 무조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걱정은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서 예상되는 위험을 대비할 수 있는 일종의 심리적인 경보(警報)이다. 단지 현대인들이 여러 가지 사회적 및 심리적 요인들에 쉽게 휘둘러서 너무 지나치게 걱정을 하고 있어서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너무 걱정만 머릿속에 달고 사는 Homo anxietas, 즉 걱정하는 인간이다. 살면서 너무 걱정만 하게 된다면 사회 활동을 하는데 지장을 준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안한 심리 상태를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에 등장하는 골랴드낀을 통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하인 뻬뜨루쉬까에게 온갖 불만과 잔소리를 다 해놓고선 나중에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를 한다. 직장에서 높은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 혹은 단체 내에서 선배 입장인 사람들에게는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이나 후배에게 잔소리를 하고나면 나중에 자신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필자도 군 생활 시절에 이런 경우를 겪은 적이 많았다. 나보다 계급이 아래인 후임병에게 심한 갈굼(잔소리, 꾸중, 혼내기 등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군대 은어)을 하고나면 이 녀석이 심하게 갈굼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병영 생활 조사 설문지에 나를 영창으로 보내기 위해서 내 이름을 적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다행히도 걱정 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골랴드낀의 기우는 자신의 분신이 막장으로 행동하면서 돌아다닐수록 심해진다. 막돼먹은 분신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던 골랴드낀은 해괴망측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신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분신에게 기가 눌린 골랴드낀은 자신의 의사를 강경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최대한 온순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표현한다. 막상 편지를 다 써놓고는 혹시나 또다시 분신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한다.
지나친 불안이 만들어낸 분신
사람이 너무 걱정에 집착하여 살게 되면 심리적 상태도 불안정하게 된다. 결국에는 사고(思考)와 감정에 이상이 생기고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하는 정신 분열증으로 발전한다. 골랴드낀의 행동에도 정신 분열증 환자의 전형적인 증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걸 그냥 내버려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순히 포기할까, 말까? 그래. 괜찮겠지?
그래, 좋았어. 멀찌감치 서서 내가 아닌 듯 구는 거야.> 골랴드낀 씨는 계속 생각했다.
<그냥 다 흘려 보내는 거야. 내가 아니야. 그러면 돼. 그자도 제멋에 사는 사람이니.
물러설지도 몰라. (중략) 위험은 무슨? 여기 어디 위험이 있다는 건지 내게 가리켜
보라지! 시시한 일이야! 별거 아냐.....!>
- 도스또예프스끼 『분신』, 석영중 역, p 129 -
정신 분열증 환자는 자신의 증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미쳤다고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골랴드낀도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냥 ‘될 대라는 식’으로 수수방관하고 있다. 골랴드낀은 너무 불안과 걱정에 지나친 나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행위의 주체인 자아마저 분열되고 말았다. 오리지널 골랴드낀은 현실적 자아이며 분신 골랴드낀은 내면적 자아인 것이다. 분신 골랴드낀은 오리지널 골랴드낀이 했던 방약무인한 행동들을 따라 한다. 그러나 오리지널 골랴드낀은 분신의 행동에 분을 삭히지 못하고 있으며 쩔쩔매고 있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골랴드낀에게는 현실적 자아만 남고 있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결국 두 개의 모순된 자아의 분열이 심각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분신』에서 보여주는 세밀한 심리 묘사는 정말 뛰어나다. 그러나 이 작품 발표 당시 반응은 너무 싸늘했다.『가난한 사람들』발표 이후로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비평가 벨린스키마저도 이 작품을 외면했으며 심지어 번역가인 석영중 교수도 역자 후기에서『분신』의 전체적인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다. 자고 난 뒤 한 유명인이 되어버린 젊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자신의 능력에 자뻑에 빠지다보니 문학적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러시아 문단에서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작품이 나온 시기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가난한 사람들』이 발표하고 난 이듬해에『분신』을 발표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인기를 더 얻기 위해서 집착하다보니 젊은 도스또예프스끼는 너무 조급했던 것일까? 만약 그가 조그만 더 참고 마무리 교정만 열심히 했었더라면 냉담한 평가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분신』이 발표하기 전에 11년 전에 니콜라이 고골은『코』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 두 작품은 플롯과 전개가 유사한 점이 많다. 두 작품의 주인공의 직업은 하급 관리이다. 고골의 작품은 주인공의 코가 갑자기 떨어져나가 자신의 분신인 마냥 관리 행세를 한다는 내용인데 비현실적인 전개와 분신 모티브는 나중에 발표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과 비슷하다. 도스또예프스끼 본인도 ‘러시아의 작가는 모두 고골의 작품에서 나왔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고골이 러시아 문학에 끼진 영향은 어마어마하며 그도 고골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권위 있던 비평가 벨린스키는 『분신』을 읽고 난 뒤, 고골을 모방했을 것 같은 졸작의 구린내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니 벨린스키로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차기작에 대해서 너무 기대했던 나머지 정작 읽고나니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7080 노래 제목 중에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라는 것이 있다. 한번쯤 겪은 실패의 고통은 훗날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진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다. 도스또예프스끼 입장에서는『분신』의 실패가 자신의 인생에서 기억하기 싫은 부분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으로 경험한 문학적 실패 덕분에 앞으로 나오게 될『죄와 벌』과『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 같은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