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그림 3 - 위험한 진실의 명화들 무서운 그림 3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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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만큼 못한 아우    


재미있게 읽은 나가노 교코의 『무서운 그림』이 3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라딘에서 접하였다. 생각도 못 했다. 저자의 2권 후기에는 후작을 기대하라는 일말의 힌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작가의 힌트를 못 알아차릴 수 있다)  뭐 어떠랴? 재미있게 읽은 책의 후작이 나오면 그냥 읽으면 되니깐. 이런 예상을 하지 못한 후작이 나오게 되면 속으로는 너무 기쁘다. 책에 대한 기대감을 간직한 채 며칠 전, 도서관 신간도서 서가에서 이 책을 만날 수 있다. 뜻밖의 만남이라서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새벽 일하는데 시간 때울 책이 없어서 곤란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을 읽게 되어서 내심 기뻤다. 제목도 '무서운 그림'이니 만큼 조용한 새벽에 혼자 읽으면 뭔가 재미있을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슬슬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새벽 2시 쯤부터『무서운 그림 3』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 3권에 소개될 무서운 그림의 목록을 쭉 훑어봤는데, 10% 정도 실망감이 들었다. 몇 몇 그림은 유명한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1, 2권을 읽으면서 헨리 퓨젤리의 <몽마>가 왜 안 나오나 싶었는데 3권에 나오니 약간은 기대감의 맥이 빠진 것은 사실이다. 초반의 실망감은 마지막 그림인 퓨젤리의 <몽마>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졌다. 그림들이 그렇게 무시무시하다거나 인상 깊지 않았다. 지루한 새벽의 시간 때우기는 좋았으나 읽기 전에 가졌던 기대감만큼 미치지 못했다.   

흥행영화 한 편과 관련된 후작들이 나오게 되면 항상 전작보다 낫지 못하다는 평을 받게 되는데 책에도 그런 악평의 법칙이 적용되는가 보다.

      

 

 보면 볼수록 애매모호한 그림   

아..... 이번 3권이 생각보다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다 보니 그렇게 인상 깊은 내용도 없고, 책 내용상 흥미있는 그림 이야기를 살짝 언급하면 안 될거 같고..... 읽고 난 뒤에는 항상 작문의 딜레마가 오는 것이 나카노 교코의 저작이다. 그래서 그림 이야기들 중에서 그렇게 인상 깊지도 않으면서도,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구태의연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브뢰겔의 <이카로스의 추락>이라는 그림을 사이트에 검색하면 이 그림과 관련된 글이 게재되어 있는 블로그가 몇 개 있다. 이 그림을 찾을 때 알게 된 것인데 리뷰 표절 의혹에 대해 문제 삼을 수 있을까봐 미리 언급하려고 한다. 내용은 블로그의 내용들과 비슷한 것은 사살이지만 그렇다고 블로그 내용 전제를 복사하여 갖다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피터르 브뢰겔의 그림이라고 추정하고 있음 <이카로스의 추락>  

그림 속 범선 밑에 잘 보면 물 위에 발이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에 빠져 다리만 보이는 인물이 하늘을 날다 바다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이카로스이다.  그림 이름이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장면을 뜻하는 것 같은데 실제 그림에는 이카로스가 추락하고 있지 않다. 그림 속 주인공은 이미 바닷물에 빠져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다. 나가노 교코는 이 그림을 그냥 <이카로스의 추락>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 <추락한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이라고 부르는 미술 도서도 있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후자의 제목이 그림과 더 어울리는 거 같다. 그림 속 육지에 있는 두 사람은 각자 밭을 가고, 양 치기하느라 이카로스가 강에 빠져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나마 이카로스가 추락한 지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흰 옷의 남자는 낚시를 하고 있는 중인데, 그 역시도 자기 코 앞에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고 있는데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는거 같다. 그래서 그림 속 풍경이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적막한 분위기도 난다. 그림 속 세 사람은 묵묵히 자기 일에 빠져 있다. 이카로스가 물에 빠지는 소리라도 들었으면 반응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됩니까?  


브뢰겔이 활동하던 16세기 네덜란드는 잦은 권력 쟁탈의 무대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 밑에 누가 반란을 일으켜 그 반란자가 새로운 왕이 되고, 왕의 반대 세력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그 반대 세력 중 한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고..... 나라를 1년 통치하는 왕이 없었다. 하나 밖에 없는 왕좌에 앉아 있기 위해 왕족들은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싸웠다. 그러다 보니 왕족 싸움이라는 고래 싸움 때문에 네덜란드 귀족과 민중의 새우들은 항상 등이 터지게 마련이었다. 왕이 하도 바뀌다 보니 이들도 도대체 누구 앞에서 복종해야하는지 속으로는 속을 앓고 있었다. 현 지배자에게 복종을 맹세했다가 얼마 안 가 지배자가 바뀌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지쳤는지 민중들은 이제 남 일 마냥 세상에 관심을 끊게 되고,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이 ‘누구누구의 지배세력을 옹호 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꺼리기도 하였다. 괜히 그 말 했다가는 또 지배가가 바뀌게 되면 모가지 날아갈 수 있으니깐.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이나 무슨 말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아니, 그냥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스스로 자기 주변에 담을 쌓고 세상사에 대해 회피하였다.
 

  

김선주 씨의 에세이집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에서 ‘별 일 없이 산다’라는 글이 있다. 그녀는 장기하의 얼굴들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면서 세상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해 스스로 무관심하고 나름 별 일 없다는 듯이 잘 사고 있는 모습을 보이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중성을 비꼬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를 세상에 대한 희망이 아닌 절망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위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네덜란드 민중들도 전쟁 없이 너도 나도 잘 사는 네덜란드를 꿈 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을 만들기 위해서는 민중의 힘이 너무 미약하였다. 결국,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절망적인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생활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세상의 소리들도 들리지 않는다. 정작 자신들보다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사람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하지만 아직 세상을 살 만하다. 절망 같은 세상 속에도 희망 한 줌은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 소수의 희망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허투루 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정말 ‘별 일 없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보다 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온 세상과 주위 사람들이 엿 같다고 해서 자신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외면하면 과연 이 세상에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김선주 씨 글의 바늘 같은 마지막 구절이 우리 스스로 세상과 담 쌓아 가두는 삶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을 찔리게 하고 있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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