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ap #1
요컨대 아침볕을 받는 곳은 저녁 그늘이 먼저 들고,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람은 이리저리 옮겨 붙어 한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 뜻을 둔 사람은 한때의 좌절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한 마리 가을 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눈은 건곤을 작게 보고, 손바닥은 우주를 가볍게 보아야만 한다.
- p 36,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 준 가계 -
...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하늘을 박차고 오를 수 있는
한 마리의 매의 기상이 있어야 한다 ...
男子漢胸中, 常有一副秋隼騰霄之氣
언제나 봐도 참 멋진 말이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다산의 글이 대부분 자신보다 어린 자식이나 젊은 제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이 많다.
그래서 요즘도 그의 글을 읽어도 전혀 오래되어 보이지 않다. 수백 년이 지나도 다산의 글에는
스승으로서 제자와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정말 다산과 같은 정신적인 멘토 한 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scrap #2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이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 p 42, 수오재기(守吾齋記) -
세상에서 변하기 쉬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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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에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 ,
바로 ‘자기 자신’ 이라고 할 것이다.
화려한 부귀가 눈앞에 있으면 1초에 생각할 겨를이 없이
혈육의 정과 우정을 쉽게 집어치울 수 있는 속물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이러 저리 당을 옮기는 정치인들,
잠깐의 향락이 주는 달콤함에 도취하여 단물이 쏙 빠지면 다른 향락을 찾는 젊은 세대들
(물론 나 자신도 포함된다).
이들은 변해가는 세상과 현실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처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들이 세상의 변화에 쉽게 휘둘러서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끝내 ‘자기 자신’도 변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산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삶의 방식도 좋지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도록 ‘나’라는 본질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scrap #3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개과(改過)’ 즉 허물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중략) 왜 그랬을까? 대개 사람의 정리란 빈번이 허물이 있는 곳에 대해 부끄러움이 변해 분노가 된다. 처음엔 아로새겨 꾸미려 들다가 마침내는 어그러져 과격하게 되고 만다. 허물을 고치는 것이 허물이 없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급하게 힘쓸 것은 오직 ‘개과’ 두 글자뿐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기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영예를 탐하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뜻이 같으면 한 패가 되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잡서를 즐겨 읽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요, 새로운 견해 내기에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이 같은 병통들은 이루 다 꼽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마땅한 약제가 있으니, 오직 ‘개(改)’란 한 글자일 뿐이다.
- p 60,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
예전에 동물 프로그램에서 좀 문제가 있는 애완견들의 성격을 바로 잡아주는
‘개’과천선(멍멍 짖는 동물의 개 + 잘못을 고쳐 올바르게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개과천선의 합성어)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주인에게 받은 애정이 부족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강아지부터 시작해서
주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버릇을 가진 강아지까지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애완견들이 등장하여 애견 전문 훈련 소장님이 개들의 못된 습관들을 고쳐주는
일종의 동물 치료를 해주는 나에게는 기억이 남는 코너였다.
그 많고 많은 문제견 중에서는 자신이 주인인 마냥 진짜 주인 사람한테 으르렁 짖어대면서
물려고 하는 하룻강아지 주인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주인도 고치지 못했던 애완견의 악습관들은 소장님의 특별한 처방과 훈련으로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애완견들이 자신이 드디어 ‘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전의 못된 성격은 온데간데없다.
개들은 제대로 훈련만 잘 해주면 못된 습성들을 쉽게 버리던데...
일부 몇 몇 인간들은 자신이 못된 허물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허물을 벗으려는 ‘개과’하려는 노력도 하지도 않으니...
옛날부터 허물이 있는 부족한 사람에게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불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scrap #4
사람은 늘 스스로를 가볍게 보고 자신을 업신여긴다. 그런 까닭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헐뜯거나 기리고, 닥치는 대로 비난하고 칭찬한다. 그 사람의 영욕과 이해가 이처럼 서로 아득한 줄은 생각지 못한다. 허락해서는 안 되는데 허락하는 것은 잘못이 오히려 내게 있지만, 배척해서는 안 될 때 배척하는 것은 해로움이 장차 남에게 미친다. 그러나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은혜와 원한은 흔히 한 마디 말 때문에 생기고, 화와 복은 한 글자로 인해 야기된다.
- p 64, 도산사숙록 -
요즘 출판사 인터넷 카페나 알라딘 서재에서 멋진 글을 읽게 되면 항상 감사의 댓글을 남긴다.
댓글 남기는 일이 습관이 되다보니 읽었던 글이 잘 쓰든 못 쓰든 그 글에 대해서
무조건 댓글을 남기려고 한다. 나 자신도 그렇게 좋은 글 솜씨도 아니길래
잘 썼다 못 썼다라고 비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상대방의 글을 읽게 되면 항상 좋은 점을 보게면서 글에서 인상이 깊었던 점 등을 언급하다보니
대부분 댓글의 내용이 칭찬과 감사 인사가 많다.
그런데 가끔 댓글 남기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생각할 때가 많다.
상대방의 글이 좋아서 남긴 것뿐인데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괜히 상대방이 나의 댓글에 부담스러워할까 댓글 하나하나 남기는데 노심초사한다.
한 번은 어느 분의 서재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는데
본의 아니게 글 작성자의 닉네임을 잘못 적은 것이었다.
다행히도 글 작성자께서 작은 실수로 넘어가주셔서 망정이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른 일은 글 작성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일일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평소에 댓글을 남겼을 때도 너무 감정에 사로잡혀 작은 일에도
가볍게 봤던 점에 대해서 반성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할 때도 잘 헤아리면서 말을 해야 되는 것처럼
댓글 작성에도 신중을 가해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