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고 장가가고 송기호 교수의 우리 역사 읽기 2
송기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 죽는 조선의 신부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었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보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원문,『미당 시전집 1』민음사 - 
 

이 시는 신랑이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달아나버리는데, 40~50년이 경과한 뒤,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 되어 버렸다는 민중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신부의 죽음은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열녀(烈女)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다.

시가 설화적인 내용이다 보니 신부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신부가 재가 되기 전까지 평생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은 조선 시대의 여성의 모습이라서 낯설지가 않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결혼은 단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필수적인 예식이다.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신랑이 누군지도 모른 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얼굴을 모르는 신랑이 올 때까지 사랑방에 기다린다. 간혹 사극을 보면 신랑이 신부의 얼굴이 못 생긴 것을 알고, 합방을 거부하고 줄행랑 치고 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신부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신랑은 씨받이라는 명목으로 첩을 두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이니 만큼 남성 중심주의의 조선 사회에서는 도망가는 신랑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처한 신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평생 시집살이의 서러움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미당은 자신의 시에서 신부의 비극적 죽음을 정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고, 평생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은 신부에 대한 신랑의 미안함도 드러나 있지 않다.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했던 남성 중심적이며 폐쇄적인 유교 사상의 뉘앙스가 풍기고 있다. 자신들에게 부당했을 유교 사회를 원망하면서 죽었을 조선 여인들에게, 미당은 이들의 죽음을 유교 사회에 걸맞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함으로써 조선의 신부들을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위기의 조선의 주부들   

조선 사회에는 여성들에게 삼종칠거(三從七去)를 강조하였다. 시집 가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시집 가서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복종한다고 했다(삼종). 그리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아들을 못 낳는 것, 음란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면 버림받는다고 했다(칠거). 삼종칠거 중에서 여성들이 갖춰야 할 유교적 소양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다. 결국에는 남성의 지위를 정립해주고 있는, 남성들을 위한 사상인 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개가를 할 수 없었으며 한 남편을 향한 수절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했다.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남편이 죽으면 조선의 부인도 따라 죽었다. 심지어 남편과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인이 먼저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여성들의 이런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사회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전란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여성들은 열녀로 추앙받았다. 

지금은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서 부르는 미망인은 지금의 뜻과 차이가 있다. 원래는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여자, 혹은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부인들을 가리킬 때 불렀다. 병자호란 때 어쩔 수 없이 공녀(貢女)로 청나라에 가야만 했던 여성들은 전란이 끝난 뒤,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는 그들을 매정하게 돌아서버렸다. 
 

  잡혀갔던 여인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란을 만나 죽지 못했 

 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 인조실록 16년(1638) 3월 11일, 송기호『시집가고 장가가고』 

  「처와 첩」에 재인용, p 121 - 
 

‘화냥년’이라는 주위에 멸시의 시선을 받아서 서러운 마당에 조정에서는 유교적 의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쌀쌀하게 대하고 있으니 공녀들에게는 하루하루를 사는데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내가 적에게 잡혀 오면 남편은 무정하게 쫒아내 버렸으며, 새로이 처를 맞아들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칠거에는 적에게 포로로 잡힌 아내를 쫓아내라는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유교와 권위를 앞세워 횡포를 부렸다. 
  

    

남편을 위해서 먼저 죽는 ‘레이디퍼스트’ 

 

나라에서는 열녀의 행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녀가 살았던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 그러나 열녀문을 세운 의도 뒤에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하려는 암묵적인 강조가 숨어 있다. 그리고 강조의 근원에는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 열녀문이 열녀를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기보다는 조선의 유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위를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성을 위한 남성의 정중한 매너와 태도를 ‘레이디퍼스트(Lady-first)'라고 부른다. 여성들은 이런 매너를 갖추지 않은 남성들을 보면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는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서 예의와 도리를 지켜야했으며 그런 태도를 보이지 못한 여성들은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만약 조선 사회에서 ’레이디퍼스트’라는 단어가 통용되었다면 남편보다 먼저 죽는 열녀를 지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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