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코스모스』의 "밤하늘의 등뼈"(7장)라는 장에는 대중들이 과학을 기피하는  
현상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소개되어 있다. 칼 세이건은 고대사를 통해서 원인을 찾고 있는데  
역사 속의 지배층들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상이 유지되기를 좋아하는 지배층들은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지배층의 과학에 대한 반감은  
대중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게 되었다. 대중들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과학자 칼 세이건이 역사를 통해서 원인을 규명한 점은 참으로 훌륭하다.  

(『코스모스』에는 저자의 전공인 천문학뿐만 아니라 과학의 역사, 문화,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들도 있다) 책 속에 소개되는 고대 그리스와 중국 역사의 예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칼 세이건이 한국사까지 자료  

조사를 안 했을 뿐이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지배계층과 과학의 불편한 만남에 대한 사례가  

있다.  바로 그 예가 장영실과 소현세자이다.

장영실은 우리나라 최초 물시계인 자격루와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등을 발명한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비범한 능력은 세종의 호의에  
힘입어서 관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논란이 있는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바꿔버렸다. 세종은 장영실이  
제작한 가마를 타게 되었는데 그만 가마가 부서져버린 것이다. 왕을 신으로 받들었던 조선  
시대에서는 이런 사고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고의 책임으로 가마를 제작한  
장영실에게 향하게 되었는데 그 벌로 곤장형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영실의 능력을 중히 여겨왔던 세종이 한 순간의 사고를 가지고 
왜 장영실에게 중한 벌을 내리게 하였을까? 가마 파손 사건은 사대부들의 음모라는 추측이 있다. 
그들은 관노 신분의 장영실이 자신들만의 세상에 끼어드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특히 유교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 사회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 라는 신분차별적인  
계층 제도였다. ‘공(工)’으로 대표되는 장영실이 사대부 사회에 계속 존재하게 되면 제2의  
장영실이 나올 수가 있다. 그들은 장영실의 존재만으로도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신분 사회  
체제가 무너질까봐 두려워했다. 정말로 가마 파손 사건이 우발적인 사고였더라도 이를 가만히  
있을 사대부가 아닐 것이다. 장영실을 축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장영실을 궁궐에 쫓아내서 좋았겠지만, 장영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우리나라 과학 기술을 스스로 쫓아내버린 셈이었다. 
 

 

 

 

 

 

 

 

 

 
 

 

 

 

 

 

 

장영실이 존재한 지 200여 년이 지난 뒤, 조선은 또 한 번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병자호란의 굴욕으로 인해서 인종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생활하게 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타국에 있는 소현세자는 인질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았다. 청나라에서의 생활을 통해 조선이 청나라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다. 당시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의 아담 샬 신부와 친분을 맺게  
되면서 그로부터 서양의 천문학 등 여러 가지 과학 지식들을 전수받았다. 오랜 청나라 생활  
끝에 소현세자는 습득한 서양의 과학 지식과 각종 과학 기술들을 가지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인조와 사대부들은 서양 문화의 물을 먹은 소현세자를 달갑게 여지기 않았다.  
인조는 청나라에서의 행실을 문제 삼아 세자를 홀대하였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세자가 학질에  
걸려 죽게 되었다. 갑작스런 세자의 죽음, 죽은 소현세자의 몸이 검붉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왕위를 이을 장자가 죽었는데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뤄지지 않은 점을 들어 인조가 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역사학계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 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다. 


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암살로 추정하고 있다. 나라의 발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과학이 발전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왔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왕과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려다보니 눈 앞에 있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만약에 장영실과 소현세자가 계속 살아있었더라면 조선의 미래는 어떻게 되어 있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과학이 완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2, 제3의 장영실이 탄생한다거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는 소현세자와 같은 정치인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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