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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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 뜨거운 전시회 홍보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하는 ‘퓰리처 상 사진전’에 대한 인기의 열기가 대단하다.
이번 달 15일부터 매주 목요일 관람 시간을 두 시간 연장하기로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시회 폐장 시간이 오후 8시이므로 목요일에는 오후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야 볼 수 있는 서양 예술 작품이나 역사적 희귀 유물들이  

전시되는 대형 기획 전시회가 우리나라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이전의 현상과  

교하면 사진 전시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퓰리처 상 사진전’을 개최 및 책임을 맡고 있는 예술의 전당은 ‘영국 근대 회화전’도  

개최하고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터너, 컨스터블, 고갱 등 근대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영국 근대 회화전’도 ‘퓰리처 상 사진전’과 더불어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관람객의 수를 기록하고 매스컴의 홍보가 많았던 ‘피사로와  

그의 가족, 친구들’ 이나 ‘르누아르 전’과 비교하면 홍보가 미미하고, 전시회 관람객 수에  

대한 소식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같은 기간에 전시하고 있는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 때문에 가려져 있는 거 같다.  

 

‘퓰리처 상 사진전’의 연장 관람 시간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줄을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을 찍은 사진이 옆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 내용에는  

사진 속 관람객들을 ‘젊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고 쓰고 있었다. 기사문을 읽어갈수록 기자의  

감정  이입이 담긴 문장에 낯뜨겁기만 하였다. 인생 선배격인 어른들이 한 마디 하시면  

두 귀를 닫고 대화를 회피하려고만 하는 단절된 세대이며, 지나간 과거나 역사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옛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다.  

기사문 중간 내용에서 전시회를 ‘역사와 인권 교과서’라고 추켜세우는
문장과 절묘하게 어울려져 ‘젊은 세대들도 공감하는 역사와 인권 전시회’임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줄 서 있는 관람객들을 보면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지금도 방학 기간을 맞아 많은 학생들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전시회에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전시회 관람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전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명한 수상작들이 전시되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빼빼 마른 아프리카의 아이의 사진,
냉정하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군인과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 단 한 방으로  

결정짓게 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콩의 사진 등..... 대부분 수상작들은 참혹한  

전쟁의 참상과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 국가의 사람들의 사진들이 있다.  

권위 있는 수상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을 찍은  

사진들도 있다. 왜 굳이 아름다운 인상주의 예술 작품 전시회를 마다하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진 작품을 보려고 오는 것일까? 
 

 

 

 고통 받는 육체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자의 육체가 그려진 그림보다는
고통 받고 있는 육체가 그려진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특히 유럽 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성경 속의 유명한 순교의 장면을 그린 종교화가 

유행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양 손과 몸에 상처를 입은 예수의 모습이나 화살이  

온 몸에 박힌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은 인간이 저지른  

원죄의 벌을 대신 받고 있는 위대한 성자(聖子)로 비춰지게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경 속 순교의 장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게 되었고 그림 속의 순교자들은  

이전보다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고통을 인내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뤼네발트 <십자가책형>,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못이 박힌 예수의 두 손과 두 발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피와 

  예수 온 몸 전체가 생긴 상처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적인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의 고통을 공감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내가 언급한 그림의 표현을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1>을 참고하면 된다. 

 
근대에 와서는 그림의 주제가 대담해진다. 인간이 저지른 전쟁과 살육 현장을 화폭에  

담아내어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잔혹성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화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람객들에게 인간의 추악한 면을 알리기 위한  

충격 요법과 동시에 잔인한 장면이지만 더욱 더 보고 싶게 되는 무의식적인   

사디즘(Sadism)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며, 인간은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들라크루아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카메라가 발달됨으로써 사진기술이 발달된다.
사진 기술이 도입이 되어서도 ‘고통 받는 육체’에 대한 주제는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특히 전 세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는 ‘종군기자’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TV가 없었던 시절에는  

전쟁터의 모습을 세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진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진의 셔터를 눌러댔다. 총탄에 맞아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병사와 포탄에 맞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진 병사의 시체가 찍힌
사진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전 세계 시민들에게 반전(反戰)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진의 활약은 끝나지 않았다.  

냉전 시대의 사회주의 국가 사회에서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살육 장면이 담긴 사진들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하였다. 전쟁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비인권적인 사회 문제와 현상들을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들은 셔터 누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찍은 사진은 빈곤국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촉발시켰고, 미군의 공습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어린이를 찍은  

사진은 미국이 시작한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의 사진 작품은  

예술성을 넘어서 작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사회의식을 관람객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그들에게도 사회 현상에 대해서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한 현상을  

다루는 사진작가들은 아무도 알고 싶지도 않은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을 사진으로  

촬영함으로써 사회를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일종의 사회 운동가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진, 관람객 그리고 TV : 불편한 삼각 관계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펴낸 저자 수잔 손탁은 오늘날의 사진 사업을 비난하고 있다.
선혈이 낭자하고 신체 일부는 절단된 사진들은 보는 이들에게는 충격을 주게 만든다.
저자는 이 점을 문제 삼아 사진 사업은 충격을 이용해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물론,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전쟁을 향한 비난을 북돋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쟁의 현실을 전달해주는 사회적인 공감  

형성은 저자는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람들이 사진 속에  

나타나는 고통의 아우라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수잔 손탁이 제기한 사회적인 문제는 사진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TV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사진작품들은 자연스러운 장면이기보다는 

작가와 사진 속 대상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로 유명한 원작 소설 <아버지의 깃발>의  

표지 속의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조 로젠탈의 1945년 퓰리처 상 수상작에서  

따온 것이다.   

 

   
 

 

 

 

 

 

 

 

 

 

                                       조 로젠탈 <성조기, 수리바치 산에 게양되다>

 이 사진으로 인해서 치열한 전장 속에서 끝내 승리한 미국을 상징하게 된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이 역사적 사진이 의도된 작품이었음을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진이 진실임을 여겨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사진이  

의도되었다고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도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어도  

대다수 사람들은 사진 속 장면들이 실제이며 우연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결국, 오늘날의 사진 작품들은 생생하게 전달되는 현실성과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생기는 허구성이 결합되는 키메라(Chimera)적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기묘한 결합으로 탄생한 사진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여러 가지 해석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람객은 사진을 보면서 이런 참혹한 일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잔혹함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더구나 문제가 있는 점은 관객들은 사진이 전달하고자 하는 충격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사진 작품이 의도적인 

구성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면 사진이 정작 알려주고 했던 의도는 퇴색이 되고, 관객들은 

그 때 알게 된 사진의 허구성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외 토픽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기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수잔 손탁은 관람객들의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으로  

TV에게도 공범죄임을 증명하는 화살을 날리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TV의  

등장으로 사진과 신문을 넘어서 가장 지배적인 보도 체제로 확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TV를 보면서도 타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안방에서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텔레비전 안의 세상 보면서 동점심이나 격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텔레비전 안의 세상도 의도적으로 구성한 세상이다.
방송으로 전파되기 전에 많은 보도 장면들 중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선별한다.  

결국에는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비춰지는 전쟁이나 빈곤 국가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TV 속 이미지는 시시각각 시청들에게 비춰진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TV 속에서 범람하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무감각해지게 된다.  

사람들이 무감각해지는 원인에는 의도적인 면도 더러 있다. 이미지가 주는 고통을  

인식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스스로 외면하기 위해서 무감각해질 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으며 자신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한, 쉽게 타인의 고통과의 합일이 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만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능력만 지적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연민만 느끼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을 보고 고통의 연민만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현실을 방관적으로 받아들인  

인식이 낳은 무고함을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저자는 심하게 손상된 시신이 담겨진  

사진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혔던 점을 예를 들어서
그런 사진 작품들은 과거 식민지주의의 오래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한다는 것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꼴이 된다. 

수잔 손탁은 9.11 테러에 관한 칼럼에서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불의의 테러 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과 추모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테러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게끔 하는 범인은 무역 센터를 폭파하게 한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중동 국가와의 대립을 조장하는 미국도 공범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패권자임을  

자처하면서 세계 평화를 주장하지만 속마음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평화를 저해하고 있는 이중적인 미국 권력의 잣대에 휘둘리는 바보가 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오류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자는 단순히 타인에게  

연민만 베풀지 말고, 고통을 받는 그들과 우리는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해결 방안이 추상적이라서  

독자들에게는 깊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최선의 대안에는 이 방법 밖에 없는 거 같다.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 
 

퓰리처 사진전에 관한 홍보성 짙은 기사문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사진전을 관람했다는 기사문이었다.  

사진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정 총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기사문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문에는 사진전을 보고 난 후의 정 총리의 소감이 짤막하게 인용하고  

있었는데, 그의 소감을 보고 나니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정 총리는 사진전은  

‘역사적 호기심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회’라고 평했다.  

이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살아있는 역사라고 비유하였다.
퓰리처 상 사진 작품들이 전시하는 목적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전시회와 차원이 다르다.  

사진 작품에는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역사의 현장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을 알려주는 역사와 인권의 이력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진전을 역사와 인권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전시회임을 표현한 정 총리의 말은  

공감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정 총리의 말을 거꾸로 비유하자면 퓰리처 상 사진전은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정 총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자극받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적 사진 작품들을 보면서 사진에 뿜어내고 있는 고통에 대해  

자극을 느껴보고, 역사의 과오들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성찰하는 행위와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지적  

행위은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성찰하는 행위는 수잔 손탁이 주장한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몸소 느껴보고, 사진 속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요인들을  

공감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반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정 총리의 말 그대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역사의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지적 호기심을 느끼고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만  

훑어보고 가는 것은 제대로 된 퓰리처 상 사진전 감상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정 총리의 인식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퓰리처 사진전을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가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에 혹하여 전시회를 찾는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을 위해서 방학 기간을 틈타 자식들 손 꼭 잡고 전시회를 찾는 부모님들.
그들도 사진 속의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공감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기 보다는
단순히 전시회의 홍보, 아니면 타인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정 총리가 베이브 루스의 은퇴식을 찍은 ‘그의 등번호, No. 3' 이라는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마지막 기사 문장을 보고나니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개입하려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퓰리처 상 사진전의 광고를 보고 난 뒤에,  

이번 사진전이 우리나라에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거 같은 역사적인 전시회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한 번은 꼭 전시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수전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면서
내가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사진전을 제대로 관람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진 전시회에 직접 찾아가서
진지하게 관람하는 일만 남았다.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시회 관람을 계기로 나도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두근거려진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퓰리처상 사진전’ 끝없는 인파 … 15일부터 관람 시간 연장] 중앙일보 7월 5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89726 

 

[정운찬 총리 “퓰리처상 사진전, 역사적·지적 호기심 자극”] 중앙일보 7월 15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7/15/3912183.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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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쓰는 김연수 도 이 책을 추천하더군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데

마음만 먹은지 1년이 넘었네요 --

cyrus 2010-11-06 16:04   좋아요 0 | URL
김연수 씨가 이 책을 추천했었군요.
간혹 이 책 중간중간에 잔인한 사진들 몇 점 있지만,,
전쟁과 국제 분쟁이 사라지지 않은 지금 이 시대에
수잔 손택이 남긴 메시지를 읽게 되면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