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잊으면 새들의 친구가 되네 - 이규보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3
이규보 지음, 김하라 편역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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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와 이의 죽음

이규보. 그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학생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작문 교과서이던가,  

한 페이지를 자리잡고 있던 <슬견설(蝨犬說)>이라는 수필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이규보의 지인(知人)이 개가 사람한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봤는데 가엾었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규보도 아주 조그만 이도 불태워 죽고 있는 게 가엾다고 말했다.
이는 인간의 머리털에 기생하여 피를 뽑는 해충이다.
그런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사람의 손에 의해 죽는 이를 가엾게 여기는 것은 듣는 입장에서는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이규보는 지인에게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논리 있게 설명한다. 
 

 당신의 열 손가락을 한 번 깨물어 보시구려.
 어디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는 아프지 않습디까?
 한 몸에 있는 것이라면 크고 작은 마디 하나하나에 모두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똑같이 아픈 것이지요. 하물며 하늘로부터
 제각각 숨과 기(氣)를 부여받은 존재로서, 어느 것은 죽음을 싫어하고
 어느 것은 죽음을 좋아할 리가 있겠소?  

 

정말 훌륭한 비유이다.
그리고 논리 전개도 뛰어나다.
하나의 사물(正)에서 부정(反)을 발견하고, 다시 이 부정론을
보다 높은 새로운 사고(合)로 만드는 변증법적 전개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길지 않은 문장에도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생명체가 크던 작던 다 살려고 하는 생명력이 있으며
더 넓게 말하자면,  

하나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사물과 현상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짧은 문장이지만 이 글의 전개 방식과 교훈이 인상 깊었고,
그 이후로 이규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생활의 발견

비록 선집이지만 이 책에 소개된
<슬견설> 이외에도 시와 산문들은 참신한 발상과 의미 있는 교훈들로 가득 찼다.
대부분 글은 자신이 겪은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나타나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난 글이지만,  

그의 글들은 기업들이 원하는 경영술을 보기도 하고
사회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풍족한 삶을 위한 처세술로 읽기에도 유용하다.

그가 쓴 시의 내용 중에서는
항상 글을 쓸 때 없어서는 안 될 벼루와 몽당 붓에게
공(功)을 인정하면서 죽을 때까지 평생 같이 하자는 의리를 보이기 한다.
(p 48. <몽당 붓> & p 254. <조그만 벼루>)
보잘 것 없는 사물일지라도 한 가지라도 유용한 능력이 있으면
인정을 해주는 그의 포용력은
요즘 유명 기업들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는  

정(情)을 강조하는 노사관계의 성격을 띄고 있다.
단순히 직원을 ‘회사를 위해 일을 하는 기계’ 가 아닌
‘회사를 위해 일하면서도 가족 같은 임원’ 의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가족이라도, 아니면 친구,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
자신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칭찬을 해라.
나 자신도 상대방에게 칭찬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은 칭찬을 듣고 나면 마음 속에 있던 고래가 기쁜 마음에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다.

그의 산문 중에는 <온실에 반대한다>(괴토실설 壞土室說, p 172)라는 글이 있다.
이규보는 자신의 자식들이 겨울에도 식물이 자라날 수 있게 온실을 만든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온실을 만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슬리는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자식에게 온실을 허물어뜨리라고 말하고,
만약 자기의 말을 어기면 혼내줄 것이라는 엄한 아버지로써 비춰지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중요시하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즘 전 세계에서 불고 있는 친(親) 환경적인 사회의 기본적인 코드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규보의 자식이 만든 온실
한창 떠들썩하고 있는 ‘4대 강 사업’ 과 똑같이 느껴진다.
4대 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4대 강 사업으로 인해
환경 오염을 물론 사람의 손을 거치치 않은 순수한 자연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말한다.
만약 이규보가 살아 있다면 그도 4대 강 사업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슬견설>처럼 하나의 현상을 비유하여 올바른 삶의 방식을 제시한 수필이 많다.
<집을 수리하고 나서>(이옥설 理屋說, p 174)에는 제목 그대로
집을 수리하면서 느낀 것을 쓴 것이다.
이규보의 집은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두 칸은 비가 새나 고치지 못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칸에도 비가 새게 되어 한꺼번에 집을 수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가 샌 지 오래 된 두 칸은
집을 구성하고 있는 서까래, 기둥, 들보가 썩어서 못 쓰게 되어  

새로운 재료에 많은 돈이 들었다.
반면, 최근에 비가 새고 있는 한 칸의 기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아직 쓸 만 했었다.
결국,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치 않은 결과에 대해서 성찰하게 되는데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번의 잘못을 해도 다시 쓸 수 있는 기둥처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결(結)에는 포괄적으로 ‘나라의 정치’ 도 이와 마찬가지임을 말하면서
당시 민심과 국정에 대한 고려 정치인들의 수수방관(袖手傍觀)적 태도를 꼬집기도 한다. 
 

 

  

 고려의 모럴리스트(Moralist)

그의 글들은 도덕적인 내용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호인 백운거사(白雲居士)가 ‘흰 구름에 사는 선비’ 라는 뜻을 보여주고 있듯이
자연을 사랑했으며 그 감정들을 아끼지 않고 글로 표현했다.
그리고 <슬견설>에서 나온 생명 존중 사상은
작은 해충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한다.(p 144, <말의 죽음>)
그는 어떻게 보면
고려의 모럴리스트(Moralist)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글로
자신뿐만 아니라 당대의 주위 사람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현자(賢者)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출판계에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많은 처세술 도서에는 분명 좋은 책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많은 책들 중에 가치가 있고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을 찾기가
백사장에 바늘 찾기이다.
넓은 서점에서 그런 책을 찾는 것은 오히려 시간낭비일뿐이다.
차라리 우리나라 옛 위인들의 옛 글을 읽는 것이 났다.
옛 선인들의 글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들의 관록(貫祿)이 묻어나 있다.
그리고 읽는 사람 맥 빠지게 사례의 장괄설을 펼치다가 마지막에 결론짓는  

요즘의 처세술 도서보다는
참신한 비유와 사례로 콕 집어 말하는 옛 선인들의 글 속에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처세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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