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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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 의 다양한 의미

 

모 검색 사이트의 한자사전에 ‘추(醜)' 라고 검색을 하였다.
‘추’(醜)는 ‘닭 유’(酉) 자와 ‘귀신 귀’(鬼) 자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검색한 사이트의 내용에는
머리에 장식한 무녀가 신전에 술을 따르는 장면을 나타내는 글자로
(사실 ‘술’ 의 뜻을 가진 한자는 ‘닭 유’ 자와 비슷한 이다)
신을 섬기는 사람, 나중에 신을 섬기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바뀌면서
‘싫어하다’ 라는 의미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검색 내용이 조금은 수긍이 안 갔지만 ‘싫어하다’ 이외에 뜻이 많이 있다.

‘못생기다, 나쁘다, 못되다, 더럽다, 미워하다, 부끄러워하다, 익살꾼.....’
여기에 제시된 문장과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뜻이 일맥상통하다.
결국은 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이는 말들이다.

나는 ‘추’ 라는 단어를 검색하기 전에는
‘추’ 라는 단어는 그냥 얼굴이 못 생김을 뜻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추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확대된다.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은 ‘추하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사고 방식, 카메라 앞에서의 돌발 행동,  

평소 사람들도 입기 힘든 옷을 입고 출연하여
'돌+아이' 라고 듣는 그 유명한 연예인도 ‘추하다’,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예전의 젊은 왕자의 모습으로 되찾은 야수와  

힘만 세지 녹색의 피부에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과 같지 않고 비호감만 들 것 같은
괴물 슈렉도 ‘추하다’  

 

 

 추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 

 

여기서 태클 걸기, 야수와 슈렉에게 ‘추하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그들에게 ‘추하다’ 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그들의 외모는 대놓고 말하자면 못생겨서 ‘추하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 만화 캐릭터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에서는 못생긴 야수와 벨과 결혼하고 싶은  

가스통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물론 가스통이라는 인물도 ‘추하다’
마을 사람들은 선동하여 야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며,
심지어 벨이 정성껏 모셔왔던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  

벨과 결혼하려고 한다.
그리고 야수가 자신을 살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한 틈을 타 야수를 죽일려고 하는
만화에서는 야수와 반대로 ‘악’의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가스통의 행동에 나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야수의 괴물스러운 용모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수를 동정하고, 벨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녹색 괴물 슈렉도 마찬가지다. 슈렉은 비록 괴물이고 못생겼어도

전 세계 어린이들을 사로잡는 친근한 만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이것말고도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영화 ‘스크림’ 의 ‘고스트 페이스’, ‘나이트메어’ 의 ‘프레디’.
이들은 무자비한 살인을 일삼는 공포 영화 시리즈의 대표적인 살인마 캐릭터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눈 뜨고 볼 수 없도록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살인 행위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두려워하고 나쁜다는 것도 알면서도

관람객은 살인마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게 되면   

살인 현장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살인마의 행위를 방관하거나 그를 좋아하는 열혈 매니아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은 1편으로만 족하지 않는다. 2편, 3편 연속으로 등장한다. 

죽다가도 다시 살아나 어지간히 사람들을 죽이는 걸로 봐서는
두 살인마는 영화광들을 매혹시키기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추’ 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기호학의 대가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재까지
‘추’ 에 관한 모든 문헌과 그림들을 통해 추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추적하였다. 
 

 

 좋은 그림, 나쁜 그림, 이상한 그림

 

움베르토 에코 이 사람,  책 한 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읽게 되면
그의 박학다식에 놀랍기만 하다.  하나의 책에 나오는 수백개의 자료와 주석들은
어디서 구하는지 대단하기만 하다.
이 책도 전작인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 만큼 많은 그림 자료들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미의 역사> 에서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좋은’ 그림들로 가득 찼다면,
후에 출간된 <추의 역사> 에서는 어둡고 우울하고,
보다 못해 두 눈으로 쳐다 보기 힘들 정도로  

사람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상한’ 그림과
정말 19세 딱지를 붙여주고 싶을 만큼 ‘나쁜’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목이 잘린 사람, 흑사병에 걸린 사람, 죽음에 사로잡혀 해골이나 다름없는 사람,

반인 반수, 기형아,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사람.....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나쁜’ 그림과 ‘이상한’ 그림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대충 그림 자료를 보고 넘기기에는  

저자에 대한 수고로움이 생각나서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번역자도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이 기록한 증언과
시대순으로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추’ 에 대해 느꼈던 것들을 기록한 문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내용 이해가 수월하였다.

전작 <미의 역사>에서처럼 ‘추’ 도 시대가 변할수록 개념과 의미가 변화되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고대, 중세, 근대 사람들의 ‘추’ 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같이 관용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추’ 는 ‘미’ 라는 정반대인 미적 개념에 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에서는 ‘추’ 를 단순히 못 생기고 악하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고,
중세에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추’ 도 세상을 이루는  

조화의 법칙에 이바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니에리스모, 르네상스로 가면 갈수록
‘추’ 를 인간의 어긋난 행동과 속물적인 면을 유추 적용하여
보기 흉한 그림들을 통하여 관람자들을 ‘조롱’ 하고
그들에게 '경고’ 를 주는 동시에 스스로 ‘경각심’ 을 일깨워주도록 하였다.
현대에 가서는 우리가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림의 인물이 분해되어 있다거나,
비정상적이고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림들을
우리는 ‘명작’ 이라고 말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을 봐라.  

  



 

 

 

 

 

 

 

제목에서는 ‘처녀’ 라고 하는데 그림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쁜 처녀가 없다.
그림 속 앉아있는 처녀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뒤죽박죽되어 있고,
다섯 명의 처녀의 벌거벗은 몸은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몸의 형상과 다르며

형체를 대충 그린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그림을 입체파의 선구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미술은 ‘추’ 를 이용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미’ 의 고정적이면서도 실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차 없이 깨뜨렸다.

물론 우리가 단순히 공포 영화를 보면서 짜릿한 공포감을 즐기는 것처럼
몇 몇 예술가들은 자신도 ‘나쁜’ 그림을 그려 스스로 ‘추’의 쾌락을 맛보거나
관람자들에게 ‘추’ 의 독특한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려는 작품도 있다.
옛날에는 공포 영화라는 것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불을 인간에게 전해줬다는 죄로 인해  

독수리들에게 간을 파먹히는 프로메테우스나
살로메에 의해 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나름 짜릿한 시각적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사에서 ‘추’ 와 ‘미’ 는 알게 모르게 서로 조화되고 있었다. 
   

 

 

 ‘추’ 의 중요성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의 ‘추’ 에 대한 열광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

결국, 실러의 말이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추’ 의 역사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못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신체의 일부가 이상이 있거나 혹은 상실되어 있는 사람을 보면 꺼려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레테의 강이 흐르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평상시에 잘 생겼다고 들어본 적 없었으며 영화배우치곤 외모에는 거리가 멀었던(?)  

유해진이 우리나라 미의 대명사인 김혜수와 사귀고 있다는 소식에 대해
사람들이 갑자기 유해진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되고
유해진은 그 소식 이후로 평범한 외모의 영화배우에서
급호감 훈남(?) 영화배우로 이미지가 역전되었다.
그리고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고 피가 튀기는
스플래터 영화에 나오는 살인 장면을 보고 우리는 거리낌없이 본다.

그렇다고 해서 ‘추’ 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에 대해서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각이 인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술은 ‘아름다움’ 과 ‘추함’ 이라는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내어
표현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만약 ‘추함’ 이라는 개념은 없고 우리의 본성에 ‘아름다움’만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남성은 무조건 이쁘고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을 것이고,
장애인, 기형아들은 인간 대접 받지 못할 것이고
예전 독일 나치가 저지른 우생학적 살육 정책이 재연될 것이다.
그리고 ‘미녀와 야수’, ‘슈렉’ 과 같은 만화 캐릭터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상상만해도 끔찍하고 생각하기가 싫다.

두꺼운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완독(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렇고 사실은
책에 나오는 그림 자료들은 빠짐없이 눈으로 확인했다)하면서
옛날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추에 대한 관심이 변한 것이 없음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름답다’ 다거나 ‘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있다.
얼굴은 못생겼어도 마음씨는 착한 사람들도 있고,
얼굴은 온화하고 잘 생겼어도 시커먼 본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이런데 과연 ‘미’가 무조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며
‘추’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미’ 와 ‘추’ 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뱀의 다리) Mi dispiace, Umberto Eco

먼저 움베르토 에코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겠다.
세계적인 석학이 쓴 도서에 대해 나름 태클을 걸겠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 는 모든 역사 속에서 ‘추’ 를 표현한 그림들을
소개하여 미술사 서적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자료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그의 수고로움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동양의 그림들은 눈 뜨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을 완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동양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고대 중국의 최고(最古)의 문헌인 <산해경>에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괴이한 짐승이 소개되어 있다. 그 짐승들을 보면 

정말 입에서 '추하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빠질 수가 없다.
정말 우리나라에도 나름 ‘추’ 에 관련된 그림과 신화, 전설, 문헌들이 많이 있다. 
용 된 ‘추남’ 의 대명사 온달 왕자, 도깨비에게 혹을 팔아 넘긴 혹부리 영감 이야기,
우리나라 대표적인 귀신 구미호,

사람 얼굴이라고 하기엔 해학적인 모습의 탈들.....
대표적으로 열거한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어쨌든 움베르토 에코가 동양의 자료들도 소개해줬으면
분량은 더 늘어나도 지금의 책보다 내용면으로 훌륭하고 내용도 균형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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