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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 방송에서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요즘 TV에서 자주 나오는 행위예술가 낸시 랭과 K 방송국 유명 개그맨들
그리고 유치원에 다닐듯한 어린이들이 나와
미술을 소개하고 직접 체험하는 유아용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호기심이 생겨 잠깐 그 채널을 고정하고 있을 때
내가 봤던 장면은 어린이들이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보고
감상한 것을 이야기하고 낸시 랭이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애들 나이 또래 때에는 미술이란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그리기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TV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방법뿐만 아니라
벌써 그림을 ‘보는’ 방법도 배우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교육에 참 좋은 프로그램인 거 같은데
왠지 얼마 안 가 종영할 거 같았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보게 된 시간은 오후 4시쯤이었는데
이 시간이면 어린이들이 집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유아 교양 프로그램이 예전만큼 시청률도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예상을 들어맞았다. 프로그램은 1년도 채 안 되어 종영되었다.
미술에 대한 선입견 깨뜨리기
예상대로 종영되었지만
아마도 유아를 위한 수준 높은 미술 교육 프로그램은 그것이 최초일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준 거 같다.
예전 유아를 위한 미술 교양 프로그램은 단순히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그리거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쓰고 있는 물건들로 공예 작품을 만드는 등
딱 ‘어린이’들을 위한 수준으로만 그쳤다.
과연 유아 교육 프로그램의 황금기에 자란 아이들은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TV에서 그림이나 공예 만드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무조건 TV에서 알려주는 방법대로 하면 멋진 미술 작품이 나온다고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계속 시도하다가
결국은 TV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술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감정을 지닌 채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수록
어렸을 때 느낀 미술의 즐거움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 때 미술은 단지 ‘성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고등학생 때는 대입 내신 성적을 위해 미술 과목을 암기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게 되면 미술은 자신의 삶과 관련 없는 쓸데없는 일이다.
미술관에 그림 감상하는 일은 돈이 있고 특별한 사람들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유아를 겨냥한 미술 프로그램을 봐야하는가.
그런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면서도 미술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미학자인 진중권 씨가 <교수대 위의 까치>를 펴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그림은 화가와 감상자의 공동 창작의 산물이다. 그래서 감상자 역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말은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저자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생각과 방법으로 창조적으로 그림을 보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물론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해 올바른 의도와 해석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림을 감상하여 깨닫는 것은 미술이라는 분야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미술을 바라보는 의지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은 말한다.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지’이다.
미술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중세의 그림들을 보게 되면 뭔가 부정확하고 어수룩한 면이 있다.
르네상스부터 근대 고전주의로 갈수록 그림 그리는 방법이 정형화되면서
더욱 정확해지고 그림다운 그림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근대부터 현대로 오게 되면서 그림은 다시 부정확해지고
감상자는 이해 불가능해진다.
세잔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피카소가 그린 사람은 형체가 쪼개져서 나온다.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아무 생각 없이 물감을 뿌려댄 것을 그림이라고 하고
마르셀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예술 작품이라고 우긴다.
알로이스 리글은 현대로 갈수록 중세 미술보다 못한 그림들이 나오는 이유는
화가가 표현을 지향하는 것보다 자신이 느끼는대로 그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의 철학 개념을 빗대어 ‘창조적 역행’ 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화가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은 화가의 ‘의지’인 것이다.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은 창조적 역행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만큼 예술가들은 자신의 다양한 생각들을 작품으로 표출한다.
과거 미술은 획일화되면서도 정립되어진 이미지의 감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은 다양성과 동시에 해석의 난해성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자면
도상학에서는 그림 속의 해골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불문법적 감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전통 미술에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사건이 있었다.
영국의 대중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해골을 작품으로 출품한다.
작품명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
고가의 보석으로 만든 작품인 만큼 보험에 가입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세계 곳곳 전시 투어를 하게 된다.
데미안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하여>
결국 허스트의 의도는 전시 투어를 통해
이 작품을 구입할 상류층 컬렉터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마케팅을 미술 판매 전략에 적용한 것이다.
작품 이름만 들어도 알다시피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은
예전의 부정적인 죽음의 이미지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고귀한 그리고 사람들에게 팔기 위한 미술품으로 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미술은 변하고 있다.
그리고 감상자들도 이에 부응하듯 변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 틀에 박힌 정형적인 감상이 아닌
이제는 ‘나는 그림을 이렇게 그렸다’ 라는 화가의 의지를
감상자도 스스로 미술을 보는 의지를 가지면서 다양한 감상을 해야 한다.
미술을 보는 의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술을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