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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마법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려낸 고요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4점 ★★★★ A-
사람을 그리지 못해서 슬픈 화가를 아시는가? 이 화가는 모델의 얼굴만 보면 긴장한다. 그가 인물화를 그리려고 하면 붓이 뻣뻣해진다. 그림이 완성되지 못한 캔버스는 수줍은 화가를 지켜주는 가림막이다. 화가는 꿋꿋하게 그려보지만, 붓이 가는 대로 그리지 못한 인물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누드 그림도 못 그린다.
화가는 사람보다 나무, 바위, 산, 바다를 좋아한다. 그는 도시를 여행하면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화가는 인물화를 포기하고 풍경화를 그리는 일에 매진한다. 그런데 그가 그린 풍경화는 독특하다. 그림에 나온 인물은 한두 명, 많으면 세 명이다. 인물화에 자신 없던 화가는 사람을 아주 작게 그리거나 뒤돌아선 모습을 그렸다. 사람 한 점 없는 풍경화는 쓸쓸하고, 적막하고, 그윽하다.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 못해 풍경화만 열심히 그린 독일의 화가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자신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 동료 화가들은 인물화와 누드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프리드리히를 비웃는다. 쓸쓸한 공기가 흐르는 풍경화는 인기가 없다. 프리드리히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림을 그린 자신을 애벌레에 비유한다. 외로운 애벌레는 고치와 같은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린다. 대중과 후대의 화가들에게 인정받는 화려한 나비가 될지, 아니면 어둠 한구석에 있는 구더기로 남게 될지 시대에 맡기겠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침묵의 마법》은 백 년 동안 무명의 구더기로 지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나비가 된 화가의 일생을 들려준다.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뤼겐의 백악 절벽>은 한때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으로 확정되기까지 백 년이나 걸렸다. 백 년 묵은 구더기가 어두운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20세기에 도착한 프리드리히의 날갯짓은 부자연스러웠다. 20세기 독일은 프리드리히가 살았던 19세기 독일과 너무나도 달랐다. 20세기 독일은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치(Nazi)가 휘어잡고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20세기에 날갯짓을 하는 데 도움을 준 미술사학자는 열렬한 나치즘 신봉자였다. 히틀러에 경도된 미술사학자는 프리드리히를 ‘강인한 게르만인’으로 둔갑시켰다. 강인한 게르만인은 나치가 선호하는 인간상이다. 프리드리히는 시대를 또 한 번 잘못 만났고, 본의 아니게 나치에 복무하는 나비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 화가는 눈으로 본 자연을 똑같이 그리지 않는다. 자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그에게 자연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다. 프리드리히는 예술학교 정교수로 채용되지 못해서 실망했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빗댄 <좌절된 희망>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여백이 칠해져 있다. 감상자는 풍경화의 여백에 자신이 느낀 것들을 그릴 수 있다. 수많은 감상자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 다시 그렸다. 독일의 작가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는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를 보자마자 언젠가 자신을 덮치게 될 무거운 절망감을 느꼈다(클라이스트는 34세에 자살했다). 히틀러를 지지한 미술사학자들은 그림 속에 고대 게르만인의 강인한 정신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에 세뇌당한 독일 군인들은 수첩에 그려진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전투 의지를 높였다.
시대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다만 시대가 변할수록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프리드리히를 심하게 왜곡한 감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잊힐 뻔한 화가를 재조명하게 해주었다. 예술은 시대적인 분위기와 이데올로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때론 정치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감상과 해석의 범위가 더 넓어진다. 그래야 대중은 예술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술 작품은 화가가 단독으로 그린 작품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화가가 죽어서도 살아 있으며 감상자의 다양한 생각을 흡수한다. 감상자의 해석은 작품 일부가 되기도 한다. 작품 속에 숨어 있는 화가의 해석과 작품 밖에 있는 감상자의 해석을 구분 짓는 경계는 흐릿해진다. 《침묵의 마법》은 예술이 창작자의 감정과 경험으로만 빚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살아 있는 예술은 늘 열려 있다. 감상자의 해석을 막는 예술 작품은 매력이 없다.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잘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유명해지지 않았다. 시대와 불화했던 프리드리히는 아틀리에에 갇히다시피 살았지만, 풍경화는 모든 감상자를 위해 활짝 열어 놓은 그림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감상자는 화가가 되어 완성된 그림에 자신만의 의미를 새로 그렸다. 감상자들이 그림을 다시 그린 덕분에 프리드리히는 유명해졌다. 사람들의 눈빛을 듬뿍 받은 그는 독일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나비가 될 수 있었다.
<책의 여백에 적은 cyrus의 주석>
* 227쪽
마르셀 프루스트는 프리드리히가 숨겨놓은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이렇게 충고한다. “언제나 당신 인생 위에 한 조각 하늘을 간직하시오.” [주]
[주] 저자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문장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부 「스완네 집 쪽으로」(1권,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년)에 나온다.
“어린 친구, 언제나 그대 인생 위에 한 조각 하늘을 간직하게나.”
(김희영 옮김, 1권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