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라이프 - 20세기 주거건축의 사상을 찾아서
이냐키 아발로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이유출판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철학자를 건축가로 비유하면, 철학자가 쓴 책은 철학으로 만든 집의 설계도다. 철학자는 사람들을 철학의 집으로 초대한다. 철학의 집은 편안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철학의 집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거푸집이다. 마음에 드는 철학 거푸집을 발견한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면 철학자가 된다. 철학 거푸집에 거주하는 철학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생각한다.








니체(Nietzsche)과거에 만들어진 철학의 집들을 망치로 부수는 철학자. 그의 책 아침놀철거 서약서. 니체는 플라톤(Plato) 이후에 활동한 철학적 건축가들을 비판한다. 철학적 건축가들이 철학의 집을 지으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재료는 도덕이다. 도덕으로 만든 집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도덕에 복종한다. 도덕을 너무 믿고 따르면 개인의 자유는 사라지며 욕망은 억눌린다도덕은 삶의 주인이 아니다. 니체는 도덕 철학의 집들을 철거한 다음에 도덕이 무너진 그 자리를 쟁기로 갈아엎는다. 니체는 자신만의 철학의 집을 세우기 전에 땅속에 구멍을 뚫는작업을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도덕에 대한 신념을 파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도덕의 집이 무너져도 흩어진 잔해들은 또다시 도덕의 집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된다.


니체는 철학적 건축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니체가 열심히 쟁기질한 땅에 새로운 철학적 건축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도덕이 주인인 철학의 집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이 주인이 되는 철학의 집을 만들었다굿 라이프: 20세기 주거 건축의 사상을 찾아서니체 이후에 활동한 20세기 철학적 건축가들을 소개한 책이다20세기의 철학적 건축가들은 다수가 선호하는 좋은 집의 조건을 거부한다. 좋은 집4인 이상 가족이 살 수 있어야 하며,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적 건축가들이 설계한 집은 오로지 건축가를 위한 공간이다. 주로 많이 사용된 재료는 건축가의 상상력이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의 정의를 의심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건물은 형태가 없으며 가족도, ‘라는 개인도 살지 않는다


책은 총 일곱 군데 철학의 집을 소개한다. 독자들이 제일 먼저 방문하는 집은 차라투스트라의 집이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초인(Übermensch)을 상징하는 존재.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어(Mies van der Rohe)8년 동안 중정이 있는 집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중정이 있는 집의 주인은 도덕을 거부하고, 자아를 변화하는 일에 전념한 차라투스트라다니체 철학을 좋아하는 거주자라면 이 집을 거푸집으로 삼을 수 있다.


니체의 망치에 의해서 도덕 철학의 집이 무너진 이후에 철학을 잊은 사람들은 과학과 공업 기술로 만들어진 집을 선호했다. 과학 지식이 적용된 공법, 실증주의적 건축 방식이 유행하면서 저비용으로 많은 양의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실증주의적 건축술의 목표는 대량 건설, 표준화된 설계실증주의가 가져다준 혜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과거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삶의 여유를 잃어버렸다니체는 실증주의를 비판한 철학자다. 미스 반 데 로어가 구상한 차라투스트라의 집굿 라이프에 첫 번째로 소개된 반실증주의적 건축물이다.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인 현상학을 만들었다. 현상학은 개인의 경험을 분석하는 실증주의와 다르게 개인의 경험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현상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객관성이 아닌 주관성이다그래서 현상학자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물을 한데 모아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콜라주(collage) 또는 브리콜뢰르(bricoleur)을 선호한다. 어린이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 줄 안다. 따라서 주관성이 강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현상학적 집에 입주할 수 있.


굿 라이프실제로 만들어진 집도 나온다팩토리(Factory)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실이다. 팩토리는 무의식과 욕망을 탐구한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계급 없는 세상을 꿈꾼 마르크스(Karl Marx)가 혼합된 건축물이다. 이곳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개성과 욕망이 억눌린 채 살아온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팩토리에 자주 드나들었다. 팩토리는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축제의 장이다.


집을 짓는 일 또한 철학을 하는 일과 같다. 집과 철학은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한 뼈대다. 뼈대가 튼튼해야 외부의 유혹과 세파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잘 만든 집에 오래 살다 보면 한계와 문제점이 눈에 보인다. 철학적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굿 라이프는 책에 소개된 철학적 건축물들에 입주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과대광고를 하지 않는다. 책은 철학적 건축물들의 한계도 밝힌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집에 인간이 산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철학자의 언어와 사유가 스며든 집을 본격적으로 탐구한 철학자다. 하이데거가 생각한 실존주의자의 집그 집에 사는 사람의 내면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가부장적 권위를 중시하는 실존주의자가 집주인이 되면 그 집 안에 딱딱한 수직적 문화가 흐른다현상학적인 집에 설계자와 거주자의 취향이 반영된 장식품이 많다. 겉만 화려한 현상학적 집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거주자들에게 추천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집은 건축가의 실험 정신이 많이 반영된 가상 공간이다. 현실 도피에 가까운 과도한 실험 정신은 비현실적인 집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마저 파괴한다.


굿 라이프집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선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좋은 삶의 조건과,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좋은 집의 조건 또한 다양하다. 철학은 집을 만들 때 쓸 수 있는 좋은 재료. 그렇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교조주의적 성향이 강한 철학으로 지어진 집은 부실하다. 불량한 사상(思想)이 가득한 집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없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 cyrus의 정오표




* 65




 

 실존적인 집이 가부장적 권위의 체계와 연결되며, 자기 중심화되고 초월적이며 수직적인 공간 조직을 갖는다는 사실을 명학하게 보여준다.



명학하게 명확하게






* 93쪽 각주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1856~1925) [주]



[] 테일러의 사망 연도는 1915이다.





* 133쪽 각주






조르지오 데 기리코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