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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실험 - 세상을 증명하는 실험과학의 역사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6월
평점 :
평점
4.5점 ★★★★☆ A
열매는 씨앗 주머니다. 열매는 먹어야 사는 우리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열매가 우리에게 ‘날 먹어도 돼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열매가 하는 일이 있다. 열매는 씨앗을 보호한다. 열매가 생겨야 씨앗을 보호해서 온 세상에 퍼뜨릴 수 있다.
‘실험’의 머리글자 ‘실’은 열매를 뜻하는 한자(實)다. 실험이 열매라고 하면 그 속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들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론 또는 법칙이라고 부른다. 열매가 생기기 전 상태를 ‘씨방’이라 한다. 씨방이 변해야 열매가 된다. 씨방은 ‘가설’에 해당한다. 가설이 사실인지 알려면 반드시 실험해야 한다. 사실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진리가 될 수 없다. 즉, 열매로 맺어질 수 없다. 가설이 사실로 판명되면 이론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열매가 맺으면 학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법칙으로 영글어진 진리를 섭취한다. 누군가는 실험을 통과하지 않은 가설을 진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제대로 익지 않은 씨방을 먹음직스러운 열매라고 우기는 꼴이다. 사이비 꾼은 사실이 아닌 본인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억지로 주장한다. 그들은 실험과 검증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닌 사실’이 들통나니까. 변하지 않은 씨방은 열매가 될 수 없듯이 실험을 진행하지 않은 가설은 법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실험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믿고 먹을 수 있는 ‘학문의 열매’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반복한다. 실험을 여러 번 해서 비슷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한 치의 오차가 있으면 다시 실험한다. 우리는 그걸 ‘실패’라고 부른다. 실패는 우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패를 좋아한다. 과학 분야에서 실패는 빈번한 일이다. 실패한 경험이 누적되면 과학자들은 실험 방식의 미흡한 점이나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과학’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실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가 ‘과학’ 나무를 돌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잘 익은 ‘실험’ 열매를 수확할 뿐만 아니라 ‘과학’ 나무에 기생해서 자라라는 가짜 정보와 유사 과학을 잘라낸다. 《아름다운 실험: 세상을 증명하는 실험과학의 역사》는 ‘과학’ 나무에 열린 ‘실험’ 열매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실험 열매 도감’이다. 이 책에 실험과 관련된 도판이 풍부하다. 실험 과정의 한 장면, 실험 도구와 장비들의 생김새, 과학자들이 직접 쓴 실험 노트 일부를 알 수 있는 도판들은 독자를 실험 현장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름다운 실험》은 ‘제목과 내용이 다른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소개된 ‘실험’ 열매들의 탄생 과정이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앞서 과학자들이 실패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실험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직면하면 난처해한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있는 지식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실험 결론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1887년에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과 에드워드 몰리(Edward Morley)는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진행한다. 이 실험이 진행되었던 시기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빛은 파동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빛을 전달하는 매질은 ‘에테르(aether)’라고 믿었다. 마이컬슨도 에테르의 실체를 믿었다. 그는 에테르를 증명하고 싶어서 실험했다. 실험 도구는 정밀도가 높은 간섭계였다. 그런데 간섭계는 마이컬슨에게 ‘에테르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한 마이컬슨은 처음에 이 실험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은 마이컬슨은 실험을 반복했고 간섭계가 알려준 결론을 받아들인다.
과학자들이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과학 실험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인 인과 관계에 따라 완벽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험 도중에 불쑥 끼어든 ‘우연’이 뜻밖의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우연으로 만들어진 발명이 없다(None of my inventions came by accident)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연으로 만들어진 실험’이 생각보다 많다.
실험과학의 역사는 ‘실패와 우연이 뒤섞인’ 역사다. 여기에 과학자들의 솔직한 ‘욕망’ 한 움큼도 섞여 있다. ‘아름다운 과학’이 아니라 ‘지저분한 과학’이다. ‘지저분한 과학’은 실험실에서 이루어진다. 우연과 실패가 과학자들을 괴롭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처음부터 실험해야 한다. 명예욕이 큰 과학자들은 ‘자기기만’의 유혹을 참지 못한다. 자신을 속이는 과학자들은 남들을 속인다.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얻으려고 실험 과정을 조작하거나 결론에 맞지 않는 오차를 의도적으로 은폐한다. 과학 교과서는 ‘실패’, ‘우연’, ‘욕망’을 말끔히 제거한 ‘아름다운 과학’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실험실이 아닌 교실에 갇혀 있다. 교실에서 ‘보정이 심한’ 과학을 외운다. 실험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성공적인 결과’만 본다. 우리나라 과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실험’ 열매가 생기는 과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열매를 주야장천 먹으라고 강요한다. 과학 교과서에 의존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과학이 긍정하는 실패를 용납하지 못한다. 과학은 지저분해야 한다. 실패와 오류를 두려워하고, 성공과 실적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과학’ 나무는 성장이 더디다. 실패가 자라나지 않는 ‘아름다운 과학’ 나무에서 달린 ‘실험’ 열매는 ‘빛 좋은 개살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