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Me)


No. 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한 걸음씩 뛰어넘으면,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획득한다. 그 결과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따뜻한 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가와우치 아리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중에서, 205)

 


이 문장에 영감을 받아 예술작품 리뷰만 모아놓은 카테고리 이름 두루미로 정했다. 여기서 아름다울 미()’를 뜻하는 영어 ‘me’,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두루미는 새 이름이 아니라 나 혼자 전시회에 가서 예술 작품을 두루두루 보는’ 경험을 상징하는 조어(造語).










<마뉴엘 솔라노: Pijama>

장소: 페레스 프로젝트

전시 기간: 20231130~ 2024114

무료

2023년 12월 9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첫 만남







가장 처음 한 사람의 인생을 찍어주는 사진사는 부모다. 어린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의 사진기 안으로 들어간다. 키가 커진 아이는 사진기 밖으로 나온다. 이제는 그가 사진사가 되어 자식의 인생을 카메라에 담는다.















* 데이비드 호크니, 남경태 옮김 명화의 비밀: 호크니가 파헤친 거장들의 비법(한길사, 2019)



 

사진사라는 직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화가가 사진사였다. 아주 오래전에 화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이며 사진기의 조상이다. 어둠을 채운 방의 한쪽 벽에 구멍을 뚫는다. 구멍으로 흘러 들어온 외부 풍경이 반대쪽 벽에 거꾸로 맺힌다. 방 안에 들어간 화가는 거꾸로 된 세상을 화폭에 담는다영국의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사진기가 상용화되기 전에 살았던 회화의 거장들이 거울과 렌즈를 응용한 광학 장치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한다.

 

멕시코의 화가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1987년생)2014년에 HIV 감염에 따른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빛과 물감으로 가득한 솔라노의 인생은 거대한 암실에 갇힌다. 솔라노는 여름이 되면 스페인에서 부는 뜨거운 바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거대한 암실은 예술에 대한 솔라노의 뜨거운 열정을 막지 못한다. 오히려 너무 뜨거워서 암실의 한쪽 벽에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 구멍이 생겼다. 솔라노는 그 구멍에서 나온 형상을 캔버스에 담았다. 솔라노의 양손 끝은 붓이 되었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크고 작은 기억의 조각들은 물감의 역할을 대신했다. 솔라노는 기억의 조각들을 녹여서 캔버스에 발랐다.












 

솔라노의 서울 첫 개인전 <마뉴엘 솔라노: Pijama>가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 페레스 프로젝트(Peres Projects)’에서 진행되고 있다. 캔버스에 기억을 바른 작품뿐만 아니라 솔라노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는 영상 작품들(작품명: 어렸을 때, 암컷 새끼 오리)도 공개하고 있다.







마누엘 솔라노

파자마

2023



   

파자마(Pijama)는 춤추는 솔라노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재현한 자화상이다. 파자마앞에 서면 어린 솔라노를 들썩이게 만든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솔라노는 부모의 침대에서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리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우연히 만났을 것이다. 분명 솔라노가 어린 시절 들은 노래는 멕시코 음악이다. 하지만 그림 속 어린 솔라노를 계속 응시하면 춤에 빠져든 솔라노의 감정에 이입된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해준 추억의 음악이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어린이는 동요만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린이는 가사의 뜻은 몰라도 특정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계속 그 음악만 들으려고 한다. 어떤 아이는 노랫말을 또렷하게 말하지 못해도 트로트만 나오면 흥얼거리면서 따라 부른다. 어릴 적에 판소리를 좋아해서 국악인이 된 신동도 있다. 어떤 음악만 나오면 춤을 추는 아이도 있다. 내 어머니가 회상하기를, 어린 시절 나는 일기예보 음악만 나오면 TV 앞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지금도 사진첩에 당시 춤추는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이 없었으면 무아경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누엘 솔라노

햇살 또는 티라노사우루스 의상

2023



   

햇살 또는 티라노사우루스 의상은 한 장의 가족사진과 같은 작품이다. 작품 속 솔라노의 어머니는 사진사가 되어 티라노사우루스 의상을 입은 솔라노의 남동생을 찍고 있다











거대한 크기의 작품 앞에 몬테소리 교구(장난감)’이 있다장난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가만히 놓여 있으면 조용한 물건이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만져보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놀이하는 행위의 즐거움이 새록새록 떠오른다장난감 블록을 만지면서 노는 어린이는 예술하는 인간의 원형이다어린이는 자신이 직접 장난감으로 작품을 만들어 부모 앞에서 보여준다. 그 순간 부모는 어린 예술가의 자질을 알아보는 첫 번째 관람자가 된다갤러리 전시 첫날에 솔라노는 몬테소리 교구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동문선, 2006)





사진 찍고 있는 어머니가 있는 장소는 솔라노 가족이 살았던 집이면서도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이기도 하. 카메라 루시다 역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비슷한 광학 장치로, 카메라 옵스큐라와 반대로 밝은 방을 뜻한다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저서 밝은 방(원제: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단어는 찌르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푼크툼은 사진이나 예술 작품을 관람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 상태에 비추어 해석하는 방식을 말한다. 바르트는 푼크툼의 원래 뜻을 상기하면서 사진의 푼크품 나를 찌르면서 상처를 주는 우연이라고 설명한다.


작품 속 장소는 밝은 방이고, 작품명에 햇살이 비쳐 있다. 여기서 거꾸로 해석해보자어린 솔라노는 사진사와 사진 모델이 된 어머니와 남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자기 자신을 찌르는푼크툼이 화살처럼 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어린 솔라노는 어머니의 따사로운 시선을 한몸에 받은 남동생을 바라보면서 부러움과 질투심을 동시에 느꼈을 수 있다


사람의 기억 용량은 한정적이라서 어릴 적 순간적으로 느꼈을 모든 감정 상태를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나쁜 기억보다는 즐겁고 행복한 기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한다. 보존된 기억을 녹여서 작품을 만드는 솔라노도 인간의 취약성을 잘 알고 있다.[주] 사진 모델이 된 남동생을 향한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만약에 어린 솔라노가 나도 사진에 찍히고 싶다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면햇살 또는 티라노사우루스 의상솔라노의 삶을 콕 찌른 순간을 형상화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주] 솔라노는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아 탐구하고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쁜 기억이 있다면 그림에 투영된다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라면 기쁘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출처: <시력 잃고도 못 잊은 캔버스손끝을 붓 삼아 세계를 칠하다> 문화일보, 유승목 기자, 2023126일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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