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보면 희곡, 멀리서 보면 연극
No. 1
* 연극저항집단 백치들 - 2023 연출 연극 프로젝트
『이번 생은 참기 힘들어』
히라타 오리자 지음
성기웅 옮김
이상명 번안 · 연출
11월 30일 관람
일본의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平田オリザ)의 희곡집은 현재 총 세 권이 번역 출간되었다. 제목은 《도쿄 노트》, 《과학하는 마음》, 《서울 시민》이다. 세 권 모두 2015년에 나왔는데, <혁명 일기>라는 제목의 희곡집은 출간되지 않은 상태다.
* 히라타 오리자, 성기웅 옮김 《도쿄 노트》 (현암사, 2013년)
* [절판] 히라타 오리자, 성기웅 옮김 《과학하는 마음》 (현암사, 2013년)
* 히라타 오리자, 성기웅 옮김 《서울 시민》 (현암사, 2013년)
《과학하는 마음》은 과학자를 주제로 한 네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과학하는 마음』, 『북방한계선의 원숭이』, 『발칸 동물원』은 ‘과학 3부작’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나머지 한 편은 공연작 『이번 생은 참기 힘들어』(약칭 ‘이번 생’)다.
대명공연거리에 활동하는 극단 ‘연극저항집단 백치들’의 『이번 생』은 낭독극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 앉아서 대사를 읽는다. 때론 몇몇 인물은 연출된 동선에 따라 움직이면서 연기하기도 한다.
『이번 생』은 시골에서 기생충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상적인 대화 장면이 주를 이룬다. 기생충학자 영민(남우희 분)은 기생충 연구를 위해 시골로 이사한다. 서울 토박이 유정(김강원 분)은 남편의 선택을 존중해서 시골로 왔지만, 여전히 이곳 생활이 낯설고 불편해한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만나러 매일 기생충 연구소를 찾아온다. 영민과 같이 일하는 동료 학자들은 유정의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친근하게 대한다. 동료들은 유정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과 기생충 관련 지식을 알려준다. 그들과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유정은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확인한다. 하나는 어떻게든 숙주를 만나야만 살 수 있는 기생충의 삶이라면, 또 하나는 연구실 안에서 생활하는 기생충학자들의 삶이다.
『이번 생』에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등장한다. 주영(강민주 분)은 화이트보드에 기생충을 그리다가 말없이 서 있는 수수께끼의 존재를 만난다. 문제의 인물은 ‘여우 가면’을 쓰고 있다. 주영은 여우 가면 사나이가 영민일 거로 생각하고 말을 걸어보지만, 여우 가면 사나이는 묵묵부답이다. 『이번 생』을 번역한 극작가 겸 공연 연출가 성기웅은 작품 해설에서 여우 가면 사나이를 ‘관객과 또 다른 연출가들의 상상력을 채울 수 있는 여백’이라고 말한다. 여우 가면 사나이의 침묵은 그저 단순히 무의미한 행위일까? 아니면 작품 속 인물들과 관객들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픈 무언의 메시지일까?
* 마이클 셔머, 김성훈 옮김 《천국의 발명: 사후 세계, 영생,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 (arte, 2019년)
나는 여우 가면 사나이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신 또는 영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신기한 현상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천국의 발명》에서 불가사의한 현상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전까지는 즐기자고 말한다. 그 대신에 영혼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들먹이지 말아야 하며 ‘잘 모르겠어’라고 반응하면 된단다. 이럴 때 모르는 게 약이다. 견강부회한 해석들을 가져와서 설전을 벌이면 정신 건강에 해롭다. ‘연극에 저런 장면이 나올 수 있구나’하고 재미로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