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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임성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평점 :
평점
4점 ★★★★ A-
성경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헤로디아(Herodias)의 딸’은 이름이 없다. 그녀는 성경을 이탈하여 종이로 펼쳐진 무대가 설치된 희곡으로 향한다.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순간, 그녀는 헤로디아의 딸이 아니다. 이 주인공의 이름은 살로메(Salome)다.
성경에서 정숙하게 놀고 있던 헤로디아의 딸을 섭외한 극작가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다. 그는 엄숙한 도덕을 마구 조롱하는 사나운(wild) 신사다. 와일드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대는 영혼을 불어넣었다. 이로써 메마른 헤로디아의 딸은 욕정으로 살찌운 살로메로 변신한다.
병약해서 가늘어진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의 펜 끝에 검정과 흰색이 묻혀 있다. 비어즐리는 펜으로 와일드가 연출한 살로메의 영혼에 색기(色氣)를 입혔다. 와일드와 비어즐리는 무명의 여자를 단숨에 유명한 요부(femme fatale)로 만들었다.
《살로메》는 독자와 관객 모두 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와일드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의붓아버지 헤롯(Herod) 영주 앞에서 춤을 춘다. 희곡 초판에는 ‘일곱 면사포의 춤(Dance of the Seven Veils)’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와일드는 춤의 구체적인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독자와 관객에게 에로틱한 상상력을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독자와 관객은 와일드가 꾸민 여백을 통과해 헤롯의 연회가 열리는 궁전으로 향한다. 이들은 다 같이 일곱 면사포를 하나하나씩 슬며시 벗기는 살로메의 스트립쇼를 숨죽여 지켜본다. 사실 그들은 살로메가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살로메를 쳐다보는 모든 남자는 비슷한 생각을 한다. 한 몸이 된 그들이 정말로 보고 싶은 건 춤이 아니다. 살로메의 알몸이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1964년에 발표한 평론 『‘캠프’에 관한 단상』(1964년)[주]에서 ‘부자연스러운 것’과 ‘인위적이고 과장된 것을 애호’하는 취향을 ‘캠프(camp)’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캠프는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물건을 선호하게 만드는 감수성이다. 손택은 오스카 와일드의 글과 비어즐리의 그림을 캠프의 예로 든다. 《살로메》와 비어즐리의 삽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판단한다. 《살로메》 초연 당시 대중과 비평가의 대다수 반응은 ‘나쁘다’였다. 그들의 눈에 익은 엄숙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살로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엄숙함을 조롱한 와일드는 도발적이고, 과장된 아름다움을 선호한다. 따분한 도덕보다 색다른 아름다움에 우위를 두는 와일드의 탐미주의는 캠프 감수성의 또 다른 요소인 ‘동성애적 탐미주의’와 결이 같다. 캠프는 양성적 스타일인데, 와일드는 양성애자다.
《살로메》에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잔인한 묘사가 나온다. 특히 절정에 이른 희곡의 결말을 장식한 비어즐리의 삽화는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손택은 캠프에 대한 최후의 진술을 남기면서 『‘캠프’에 관한 단상』을 마무리한다.
58. 캠프의 최후 진술: 캠프는 ‘끔찍하기 때문에 좋다.’
손택은 캠프에 강하게 끌리며, 또 그만큼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살로메》를 보는 독자와 관객의 반응 역시 그렇다. 캠프 감수성이 충만한 《살로메》는 끔찍해서 매력적이며 동시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희곡이다.
《살로메》 새 번역본은 원전을 장식한 유명한 비어즐리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극 중 인물을 소개하는 장에 특별한 도판도 실려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르 운동에 참여한 화가 알렉산드라 엑스테르(Aleksandra Ekster)가 1917년에 제작한 무대 의상 디자인이다.
[주] 출전: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