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의 몸 - 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과 죽음, 예술
잭 하트넬 지음, 장성주 옮김 / 시공아트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가 아니라 서평이다. [주1]









 “그림이 움직이는 걸 들키면 서커스단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어. 문신이 날뛰는 걸 보고 누가 좋아하겠나. 게다가 그림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네. 자세히 보고 있으면 곧 그림이 이야기를 시작할 걸세. 한 세 시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 몸뚱이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스무 편쯤은 볼 수 있어. 소리도 들리고, 생각도 전해질 거야. 누가 봐주기만 기다리고 있단 말일세.”

 

(레이 브래드버리, 장성주 옮김[주2],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문신을 새긴 사나이와 열여덟 편의 이야기중에서, 13~14)

 




중세라는 이 외로운 친구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자. 어떤 이름이 잘 어울릴까. 중세는 한자 이름이고, 순우리말 이름은 미들이(Middle)’중세에게 순우리말 이름을 붙여준 작명가는 히스토리(History)’그리스 출신의 아테네 학당 소속 학생 엘 그레코(El Greco)’[주3]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교양인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 사이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중간한 이름을 받았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09~1511




엘 그레코가 르네상스 맨보다 나이가 많다. 엘 그레코는 예수가 태어나기 전(B.C: Before Christ)부터 살았다. 두 사람은 태어난 곳이 다르고,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아주 친하다. 엘 그레코와 르네상스 맨은 고전을 좋아한다.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 맨에게 아테네 학당에 같이 가자면서 꼬신다. 아테네 학당에 가면 플라톤(Plato) 선생님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 같이 갈래?”

 

미들이는 항상 성경을 들고 다닌다. 그 친구가 자주 가는 곳은 교회다엘 그레코와 르네상스 맨은 미들이를 싫어한다. 두 사람은 지나가는 미들이를 보자마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쟤는 신밖에 몰라저렇게 재미없는 녀석은 처음이야.


엘 그레코와 르네상스 맨은 재미없고, 멋이 없는 미들이에게 좋지 않은 별명을 지어준다. 미들이의 별명은 암흑어둠의 자식이다두 사람은 미들이를 만날 때마다 놀린다. 미들이 어딨어? 어! 여기 있었구나. 야 이 어둠의 자식아, 암흑시대에서 태어났냐? ㅋㅋㅋ 네가 깜깜해서 안 보인다 ㅋㅋㅋ


미들이는 쓸쓸하다. 아무도 미들이를 알아주지 않는다. 공자 선생은 미들이에게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마라(不患人之不己知)’[주4]고 위로해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미들이가 슬픔을 삼키면서 참아보지만, 미들이를 싫어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불어난다. 그들은 종교에 심취한 미들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미들이가 미친 마법사들[주5]과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학구적인 엘 그레코와 멋쟁이 르네상스 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과묵하고 무식한 미들이를 외면한다.


우리는 중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중세의 참모습을 완전히 가린 옷이다. 온통 검은 이 옷은 중세를 미워하거나 오해한 사람들이 억지로 입힌 거추장스러운 거죽이다. 중세 시대의 몸: 몸을 통해 탐색한 중세의 삶과 죽음, 예술벌거벗은 중세를 보여주는 책이다


중세인들은 몸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 자신을 신의 피조물로 여겼으면서도 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중세인들은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의학 문헌을 참고하면서 몸에 대한 지식을 축적했다. 하지만 고대의 의학 문헌에 남아 있는 의술과 약 제조법 대부분은 전혀 효과가 없는 것들이다. 대부분 사람은 엉터리 지식을 믿은 중세인들을 비웃는다.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인들의 무능한 수준을 비웃기 전에 고대인들의 한계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리다엘 그레코가 미들이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가 연출한

<The Simpsons> 핼러윈 특집 에피소드 오프닝의 한 장면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옆에 있는 사람은 

리처드 매드슨(Richard Matheson)




중세인들은 몸을 하나의 세계로 이해했다그들은 작은 세계를 하나하나 해부해서 관찰했고, 부위별로 등급을 매겼다머리는 세계의 꼭대기라서 가장 높은 1급이다. 2급은 심장이 있는 가슴이다. 3급은 소화 기관이 있는 복부(). 가장 낮은 4급은 노폐물이 나오는 생식기와 항문이다중세 지식인들은 펜에 지식을 묻혀서 인간의 몸에 문신을 새겼다그들은 문신으로 작은 세계를 가득 채웠다. 제각각 다른 이 문신들이 잘못 만들어진 거죽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중세의 참모습이다따라서 중세 시대의 몸은 중세의 참모습을 압축한 도상(圖像)이다.


중세인들의 육체는 땅속에 누워 있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중세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지금도 꿈틀거리면서 움직인다살아 있는 문신에 과거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있는 이야기(story)가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역사(History)라고 불러야 한다중세라는 몸뚱이에 펼쳐지기 시작한 문신 형태의 이야기는 생명력이 강하다. 중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신이 아니다. 신의 기적을 믿지 않았고, 식욕을 참지 못했고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고, 성욕을 숨기지 않은 인간이 주인공이다. 생기 넘치는 문신은 르네상스로 쭉쭉 뻗치면서 자란다중세라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중세를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주6] 아름다운 붉은 석양이 생긴 황혼으로 비유했다. 중세가 없으면 르네상스도 없다. 중세가 저문 자리에 르네상스가 다시 태어났다. 중세는 어둡지 않다. 문신이 가득한 벌거벗은 중세는 빛나고 있다


자, 이제 알록달록 무늬들이 계속 생기는 중세를 위해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자. 나는 이 친구를 국카스텐(Guckkasten, 만화경)’[주7]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1] 원문은 당연히, 이것은 수기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제사(題詞).

 

[2] 중세 시대의 몸의 역자이기도 하다.

 

[3] 스페인의 화가. 그리스 출신이라서 본명보다 엘 그레코(그리스 사람)’라는 별명이 더 알려졌다.

 

[4] 논어학이, 16

 

[5, 6, 7]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 수록된 단편소설 제목. 화성의 미친 마법사들(The Mad Wizards of Mars),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No Particular Night or Morning), 만화경처럼(Kaleidoscope).

 





* 14

 

 중세라는 시계의 작동 버튼을 공식적으로 눌러도 좋은 시점은 다름 아닌 로마 제국 붕괴 무렵이다. 이 제국은 이전 몇 세기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광대한 땅을 병합하고 지배했으나 476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족 오도아케르[주8]에게 폐위당하면서 곧바로 중세가 시작됐고, 이로써 유럽에서는 제국 지배기가 막을 내렸다.



* 원문





[8] 원서에 ‘Germanic King Odoacer’라고 되어 있다. 역자는 게르만족 왕으로 직역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면 ‘king(왕)’은 적절하지 않은 호칭이다.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족 왕족 출신이 아니다오도아케르의 혈통에 관한 견해도 엇갈리는데, 몇몇 역사가들은 오도아케르가 순수 게르만족이 아니라 훈족의 피가 섞인 스키리족 출신이라고 주장한다오도아케르는 서로마 제국의 장교로 활약하다가 황제를 폐위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