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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이유 - 예술 입문, 라스코에서 쿤스까지
미셸 옹프레 지음, 변광배 옮김 / 서광사 / 2023년 7월
평점 :
평점
3.5점 ★★★☆ B+
난 이렇게 널 바라보는데
넌 날 보며 웃지도 않아.
알 수 없는 널 사랑하기는
어려 어려워 정말 어려 어려워.
닥터레게(Dr. Reggae), 「어려워 정말(Who Are You?)」 노랫말,
1993년
“Ninety percent of science fiction is crud,
but then, ninety percent of everything is crud.”
“공상과학소설의 90%가 쓰레기라면,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
미국의 SF 소설가 시어도어 스터전(Theodore Sturgeon)이 남긴 말이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SF의 90%를 쓰레기라고 혹평했다. 그러자 스터전은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라고 응수했다.
대다수 사람에게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보자.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지 싶다. 요즘 예술의 90%는 쓰레기라고.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올해 초 제프 쿤스(Jeff Koons)의 『풍선 개』가 관람객의 실수로 훼손되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풍선 개』의 감정가는 훼손되기 전까지만 해도 4만 2,000달러(약 5,500만 원)였다. 『풍선 개』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을 때 당시 현장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관람객 중에 예술가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처음에 『풍선 개』가 부서지는 상황이 ‘행위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미술품 수집가는 『풍선 개』의 파편을 구매했다. 비싼 작품 일부를 가질 수 있어서 흡족했다고 한다.
반면 ‘예술의 90%는 쓰레기’ 설을 믿는 사람들은 어이없어한다. “요즘 예술가들도 쓰레기군.” 그 사람들의 눈에는 요즘 예술 작품들은 아름답지 않고, 무슨 생각으로 만들어졌는지 도통 알 수 없고, 터무니없이 비싼 ‘물건들’이다. 현대미술은 정말 어렵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예술 작품들이 너무 많다. ‘아름다움(美)’을 뜻하는 한자가 들어있는 ‘미술’이 죽은 단어(死語)라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미술가를 포함한 몇몇 사람은 ‘현대 예술’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래도 미술이든 예술이든 어려워서 머리가 아픈 건 매한가지다.
‘예술의 90%는 쓰레기’ 설을 반박할 수 있는 스터전과 같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미술가가 아닌 철학자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가 현대미술 옹호를 자처한다. 그의 책 《예술의 이유: 예술 입문, 라스코에서 쿤스까지》는 ‘현대미술을 위한 변명(apologia)’이다. 옹프레는 자신을 ‘현대 예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라고 겸손하게 소개하지만, 이 책을 쓰게 된 의도는 자못 진지하다. 《예술의 이유》는 옹프레가 ‘예술이 죽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불행한 사람들’과 투쟁하기 위해 쓴 책이다.
현대미술 앞에만 서면 기가 죽어서 작아지는 사람들은 ‘미술’의 ‘미(美, 아름다울 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 예술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보면 볼수록 예쁘고, 우아하고, 고상함이 느껴지는 예술 작품은 ‘걸작’으로 칭송받는다. 그들이 미술 작품 또는 예술 작품의 기준은 단순하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의 정의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져야 한다.
옹프레는 ‘미술’의 ‘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주장하길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의미’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항상 미술사의 시작점으로 거론되는, 가장 오래된 예술 작품이다. 벽화를 그린 익명의 선사시대 사람들은 아름답게 동물들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사냥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동물들을 그렸을 뿐이다. 아름답지 않은 예술 작품이 쓰레기라면 동굴 벽화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쓰레기’다.
옹프레는 동굴 벽화에서 제프 쿤스에 이르는 미술사를 개괄하면서 ‘미’보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발전해온 예술을 주목한다. ‘미’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예술가는 그림이든 조각이든 다양한 형태로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다. 예술가의 생각 또한 작품 제작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재료다.
옹프레는 예술 작품 속 의미와 메시지를 ‘언어’로 비유한다. 예술가는 무뚝뚝하지 않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특수 언어로 관객들에게 말 건다. 혼자서 작업실에 틀어박혀 묵묵히 그림을 그린다거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그런 예술가 이미지는 대중의 상상과 편견이 만든 것이다. 예술가는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술가는 철학, 음악, 문학 등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다. 예술가는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한다. 동료 예술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다가도 때로는 생각의 차이(예술의 정의, 표현 방식, 정치적 이념 등)로 인해 서로 죽일 듯이 다투기도 한다.
예술가의 생각이 담긴 예술은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끊임없이 변한다. 그 대신에 관객이 늘 원하던 ‘아름다움’은 점점 투명해진다. 이제 관객은 예술가의 생각을 찾아야 하고, 예술가의 요청에 응답해줘야 한다. 예술가가 죽고 없어도 예술 작품은 우리를 향해 계속 말 걸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죽지 않는다. 다만 ‘미’가 사라질 뿐이다. 영원히 남아 있는 건 ‘예술 작품’이라는 형체가 되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다.
‘의미’가 눈에 보이려면 눈으로만 예술 작품을 감상해선 안 된다. 머리로 감상해야 한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눈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예술 작품의 의미를 생각하는 행위가 쉬운 일은 아니다. 옹프레는 예술 작품의 의미에 부합하는 ‘열쇠’를 찾으라고 제안한다. 그의 말이 맞긴 하는데 ‘열쇠 찾는 일’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감상법이 아니다. 열쇠가 필요 없는 예술 작품도 있다. 그런 작품들은 오로지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 작품 속 의미를 이해하자고 강조하는 옹프레의 견해는 진부하고 한계가 있다. 열쇠를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예술 작품에 잘 들어맞던 열쇠는 시간이 지나면 녹슨다. 예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단 하나의 열쇠는 없다.
예술은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예술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오래전 헤겔(Hegel)이 주장한 이후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예술 종말론’은 인제 그만! 예술은 다양한 목소리로 채워지면서 항상 변하는 ‘유기체’ 같은 개념이다. 예술가와 예술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예술이 뭔지 열심히 떠들고 있다. 예술이 어려운 걸 잘 알면서도. 예술은 어려워, 정말!
※ cyrus의 주석
* 127쪽
<샘>(1917)은 보통 벽에 수직으로 고정되어 있다. 갤러리, 박물관 또는 수집가의 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에서 <샘>은 아랫부분에 ‘R. Mut’[주]라는 서명과 함께 받침대 위에 눕혀져 있다.
[주] 정확한 철자는 ‘R. Mutt’다.
* 역자 주, 198쪽
귀도 디 피에로(Guido di Piero) →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