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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지도 -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3년 5월
평점 :
평점
4점 ★★★★ A-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천 년’ 동안 잊힌 고대 그리스 문화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순으로 단순 나열된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이 ‘천 년’을 ‘중세’라고 생각한다. 또 중세를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사이에 끼인 ‘암흑기’로 인식한다. 마녀사냥, 흑사병, 교황, 십자군 전쟁. 우리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된 단어들은 르네상스와 비교하면 어둡고, 답답하고,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천 년’으로 뭉뚱그린 중세는 종교에 의해 과학의 발전이 발 묶인 시대, 즉 서양 지성사의 공백기로 취급받는다. 정말로 중세는 모든 것이 신과 교회가 중심이었고, 지식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꽉 막힌 어두운 시대였을까.
오랫동안 묻혀서 잘 지워지지 않은 중세의 어두운 덧칠을 쓱쓱 제거해보자. 편견과 오해가 뭉쳐져서 생긴 때를 벗긴 중세에 인간이 있었고, 사유하는 정신이 있었고, 여기에서 꽃 피운 과학이 있었다.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는 중세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와 비뚤어진 편견을 지워버리는 책이다.
《지식의 지도》 저자는 ‘고대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학(수학, 천문학, 의학) 문헌들이 중세에 어떻게 살아남아 르네상스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는 지적으로 대단히 활발한 시대였다.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세운 아랍의 군주 할리파(칼리프)는 철학, 의학, 그 밖의 다른 과학 필사본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아랍 학자들은 완전히 잊힐 뻔한 고대의 지적 유산을 소화해 제 살로 만들어 단련한 뒤 유럽으로 전파했다.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 바그다드는 고대의 지적 전통과 르네상스의 지적 전통을 이어준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기독교, 아랍 문화가 섞이고 충돌하는 ‘지식의 용광로’였다. 아랍 학자들의 공헌으로 더욱 풍부해진 고대의 지적 유산은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면서 유럽 수도원의 필사실과 학문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른 이베리아반도의 도서관에 유입되었다. 이렇듯 중세에도 학문이 전파되고 발전되는 경로가 있었다. 저자는 중세 과학 및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들, 즉 유클리드(Euclid, 수학),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천문학), 갈레노스(Galenos, 의학)의 저술이 번역되고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하여 ‘지식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중세를 복원한다.
《지식의 지도》는 야만, 폭력, 억압과 같은 부정적인 말 빛깔로 덧칠된 중세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과학 대 종교’, ‘기독교 대 이슬람’으로 양분하는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과학을 억압하는 기독교’라는 오래된 통념에 벗어나지 못했다.
히파티아의 사연은 고대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강렬한 이야기일 것이고 그래서 그는 이 시기의 가장 잘 알려진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다. [중략] 이교 문화에 적대적인 기독교도의 표적이 되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75쪽 각주)
히파티아(Hypatia)는 기독교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를 언급할 때면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히파티아의 죽음을 묘사한 일화를 인용하면서 고대 지적 유산의 가치를 무시한 기독교의 종교적 광신을 비판했다. 하지만 히파티아는 종교적 광신의 희생자가 아니다. 실제로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관직에 등용된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권력에 눈이 먼 기독교 세력 내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면서 희생당했다.[주1] 히파티아에 대한 저자의 각주는 ‘과학 대 종교(기독교)’라는 이분법적 통념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
[주1] 참고 문헌
* 로널드 L. 럼버스, 코스타스 캄푸러키스 엮음 《통념과 상식을 거스르는 과학사: 뉴턴에서 멘델까지, 과학을 둘러싼 역사적 오해들》 (글항아리사이언스, 2019)
* [절판] 로널드 L. 럼버스 엮음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뜨인돌, 2010)
※ cyrus의 주석
* 44쪽
살아남은 것은 아주 일부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80여 편 중 전해지는 것은 7편뿐이고, 소포클레스의 작품 120편 중에서 7편만 현전하며,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 92편 중 살아남은 것은 18편[주2]뿐이다.
[원문]
Only a fraction has survived: seven of the eighty or so plays by Aeschylus, seven of the one hundred and twenty by Sophocles, eighteen out of ninety-two by Euripides.
[주2] 저자가 작품 수를 착각했다. 19편이다.
* 331쪽 각주
중국에서는 13세기 초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주3]
[주3]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유네스코 세계유산기록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 연도가 불분명해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이라는 기록이 외국에서는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