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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페인팅 Final Painting - 화가 생애 마지막 그림을 그리다
파트릭 데 링크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5월
평점 :
책을 협찬받아 쓴 서평이 아닙니다.
평점
4점 ★★★★ A-
음악가가 만든 마지막 걸작을 ‘백조의 노래(Swan Song)’라고 한다. 이 관용어는 백조가 죽기 직전 마지막 힘을 다해 딱 한 번 운다는 속설에서 유래되었다. 마지막 울음소리가 아름답다는 백조의 노래는 최후의 걸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백조는 때때로 운다. 실제로 백조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면 썩 아름답지 않다.
화가의 마지막 걸작도 종종 백조의 노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미술비평가들은 유명 화가들의 말기 작품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정 기간 성장한 후 나이가 들어가면 신체와 인지 기능이 점점 쇠퇴한다. 비범한 화가도 노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비평가들은 쇠약해진 화가의 말기 작품에 원숙미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창성이 돋보인 젊은 시절 화가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말기 작품이 졸작이라고 혹평한다.
《파이널 페인팅》(The Final Painting)은 화가의 말기 작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반박한다. 책의 저자는 말기 작품에 온갖 다양한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성기 시절의 기량에는 못 미치지만, 그 안에 이전에 시도해보지 않은 기법과 혁신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힘이 있다. 황혼기에 접어든 화가들은 주변의 평가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렸다.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경화로 명성을 얻었다. 말기에 이르러 그의 작품에 묘사된 형상이 생략되고, 모호한 색채로 가득 채운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전한다. 비평가들은 나이 든 터너를 ‘세월과 동떨어진 화가’로 평가했다. 그러나 터너는 ‘세월을 앞서간 화가’였다. 사실적인 묘사의 회화를 고수하는 전통을 깨뜨린 터너의 말기 작품은 추상회화의 탄생을 예고한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말년에 손가락에서 생긴 관절염에 시달렸다. 그래서 붓을 내려놓고, 색종이를 오려 붙인 작품을 남겼다. ‘종이 오리기’ 작업은 마티스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붓을 사용하지 않는 이 기법은 붓을 든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붓을 들지 않아도 마티스는 ‘화가’다.
이 책은 일찍 세상을 떠난 화가들의 마지막 작품들도 소개한다. 시대와 관점에 따라 사람들은 완성된 작품을 미완성이라 보기도 하고, 미완성 작품을 걸작이라 칭송하기도 한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말년에 생 빅투아르 산과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여러 점을 그렸다. 그중에 6년 동안 그린 「목욕하는 사람들」(1900~1906년, Large Bathers, 일명 ‘대 수욕도’)은 미완성 작품이다. 세잔의 목표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화폭에 구현하는 일이었다. 그는 동료 화가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에게 보낸 편지에 ‘과거를 넘어서는 이론을 증명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1906년 9월 21일). 세잔의 연작 작업은 전통적인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끝없는 도전이다.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는 아내의 초상화에 자신의 좌우명을 새겨 넣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Als ich can).’ 화가의 말기 작품이 혁신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화가들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만의 미술을 추구하기 위해 손에 쥔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작품은 ‘최후의 작품’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작품’이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알
* 53쪽
우구스티누스 성인 → 아우구스티누스 성인(St. Augustine)
* 74쪽
오랜 경력을 가진 전문가 메리 가라드(Mary Garrard)[주1]는 젠틸레스키의 작품으로 기록되었거나 어느 정도 확실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130점이 넘는 그림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주1]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을 분석한 메리 D. 개러드의 저서 《여기, 아르테미시아: 최초의 여성주의 화가》(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2022)가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다.
* 89쪽
1814년에 독재적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집권하면서 구체제가 복원되었다. 프랑스 국왕 요셉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주2]의 궁정화가로 활동을 계속했던 고야는 스페인에 머물며 때때로 새 왕조를 위해 작업하기도 했다.
[주2]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의 형이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국왕이 아니라 ‘스페인 국왕’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지배하기 위해 페르난도 7세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형에게 왕관을 씌웠다. 조제프는 스페인 국왕이 되면서 ‘호세 1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호세 1세는 페르난도 7세와 달리 개혁 정치를 펼쳤지만, 스페인 내정을 간섭하는 프랑스에 반발한 민중은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동원하여 스페인 민중을 잔인하게 탄압했다(고야의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은 스페인에서 일어난 프랑스군의 잔인한 만행을 묘사한 걸작이다). 민심을 완전히 잃은 호세 1세는 1813년에 폐위되어 망명길에 올랐고, 이듬해에 페르난도 7세가 복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