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Baudelaire)와 함께하는 여름보다 터무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 《악의 꽃》을 아는 많은 이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게 분명하다.” 2014년에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앙투안 콩파뇽(Antoine Compagnon)은 보들레르가 방송에서 다루기 위험한 주제라고 밝혔다.
* 앙투안 콩파뇽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뮤진트리, 2020)
* 미셸 우엘벡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필로소픽, 2021)
콩파뇽은 보들레르를 세상을 신랄하게 바라본 ‘잔인한 검객’이며 ‘불면의 선동가’라고 평가한다. 민주주의와 진보, 여성을 증오한 보들레르는 그의 시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독자들마저도 불쾌하게 만든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대를 좋아하지 않은 비관론자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원죄를 가진 채 태어나며 도덕과 진보주의(progressivism)는 인간의 악을 감춘다.
보들레르의 비관주의는 미국의 작가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염세주의와 흡사하다. 러브크래프트 역시 인간을 악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세상을 증오했다. 공포 소설을 쓴 러브크래프트야말로 여름과 함께하기에 좋은 작가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도 보들레르 못지않게 독자들의 불쾌감을 유발하는 문제의 인물이다. 보들레르가 반유대주의자라면 러브크래프트는 히틀러(Hitler)를 지지한 인종차별주의자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트프 전집 1》 (황금가지, 2009)
* [리커버]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21)
*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3)
다독가로 알려진 러브크래프트는 과연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읽었을까? 만약 그가 보들레르의 글을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추측하건데 러브크래프트는 보들레르를 읽었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에 나온 화자는 시체를 되살리는 실험에 집착한 의사 허버트 웨스트(Herbert West)를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점점 웨스트의 실험보다 그라는 인간 자체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젊은 과학자의 열망이 병적이고 끔찍한 호기심과 납골당의 비밀로 변질되면서 나의 공포는 시작되었다. 웨스트의 관심은 더욱 혐오스럽고 극악한 형태로 바뀌었고, 성격 또한 점점 괴팍해졌다. 점자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와 역겨움 속에서 정신을 잃을 만한 상황을 흡족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는 냉혹한 지성으로 육체를 실험하는 괴팍한 보들레르이자 묘지를 헤매는 나른한 엘라가발루스였다.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터』 중에서, 89쪽)
《악의 꽃》에 수록된 『시체』는 육신이 부패하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시다. 보들레르가 묘사한, 파리와 구더기 떼가 모여 있는 시체는 ‘피어나는 꽃’이 된다. 시인은 시체가 부패되면서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이 분출하는 과정으로 본다. ‘살아 있는 시체’는 불멸의 존재다. 보들레르의 유고집 《벌거벗은 내 마음》(원제는 ‘내면 일기’)에 불멸에 대한 문장이 있다.
* [품절] 샤를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문학과지성사, 2001)
마치 인격체와도 같이 모든 관념은 그 자체로서 불멸의 삶을 부여받는다.
모든 창조된 형태는, 비록 그것이 인간에 의한 것일지라도, 불멸이다. 왜냐하면 형태는 물질로부터 독립적이고, 또한 형태를 구성하는 것은 분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내 마음》 중에서, 161쪽)
시체에 ‘불멸의 삶’을 부여한 보들레르의 발상은 불멸에 병적으로 열망한 허버트 웨스트의 모습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냉혹한 지성’, ‘괴팍한’이라는 표현은 보들레르에 어울리는 수식어다. 보들레르는 냉혹한 시선으로 19세기 파리뿐만 아니라 동시대 인간, 종교, 도덕 등을 해부한 작가다. 자신이 한 말대로 보들레르는 ‘세상의 적’이었다.
보들레르와 러브크래프트. 이 두 사람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괴팍하고, 매우 복잡한 성격의 문인이다. 콩파뇽은 “마음 가는 대로” 보들레르에 접근했다. 러브크래프트도 그렇게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이 두 사람과 함께 여름을 보내려고 한다. 올해는 보들레르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보들레르와 같은 해에 태어난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와 플로베르(Flaubert)도 내 여름 독서를 위한 주제로 삼고 싶다. 하지만 과연 이 두 문호만큼이나 누가 보들레르를 기억해줄까. 이 ‘까다로운 시인’을 잘 아는 위선적인 독자[주1]인 내가 하는 수밖에.
[주1] 《악의 꽃》의 『독자에게』 마지막 구절 참조.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알
* 《보들레르와 함께하는 여름》 157쪽
파스칼(Pascal)은 이 생각을 자신의 책 《수상록》[주2]에 이렇게 고쳐 적었다.
[주2] ‘수상록’은 몽테뉴(Montaigne)가 쓴 책의 제목이다. 원서 본문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파스칼이 쓴 수상록의 정체는 유고집 《팡세》(Pensées)일 것이다. ‘팡세’는 ‘생각들’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