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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미셸 우엘벡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4월
평점 :
평점
4점 ★★★★ A-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집 《악의 꽃》의 첫머리에 있는 『독자에게』는 시집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제일 흉하고 악랄하고 추잡한 놈’이 있다면서 독자에게 경고한다. 그놈은 소리 없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그놈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는데 지구를 박살내고, 한 번의 하품으로 지구의 모든 인류를 집어삼킬 수 있다.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 그놈의 정체를 밝힌다. 그것은 ‘권태’라는 괴물이다. 시인은 권태가 ‘다루기 힘든 괴물’이라면서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고통을 아는 소수의 독자를 ‘위선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시인의 동지와 같은 존재다. 《악의 꽃》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글에서 권태를 자주 언급했는데, 그가 내린 권태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는 현대인의 악과 천박함을 말하기 위해 권태라는 소재를 즐겨 썼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란 덧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품고 있는 불만감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을 공개하면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섰고, 천박한 대중을 향해 도발했다. 그러나 시인은 위선적인 독자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이러한 시인의 진심은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염세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글쓰기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러브크래프트는 철저하게 대중과의 거리를 둔 채 글을 썼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소설은 작가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다. 러브크래프트의 글쓰기는 단순히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서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맞서는 개인적인 분풀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와 함께 미국 공포문학의 대가로 평가받았다.[주1]
러브크래프트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독자적인 관점으로 분석한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은 러브크래프트를 ‘극단주의자’라고 평가한다. 러브크래프트는 이 세상과 모든 존재는 악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죽을 때까지 이 관점을 고수했다. 그는 세상에 불만이 많았고, 인류를 경멸했다. 어쩌면 러브크래프트가 생각한 괴물은 이 세상 자체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괴물에 분풀이하기 위해 또 하나의 ‘괴물’을 창조한다. 그것이 바로 ‘크툴루(Cthulhu)’를 비롯한 외계의 존재들이다. 러브크래프트의 괴물들은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게 하고, 그들을 눈앞에서 본 인간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괴물과의 조우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정신을 습격하는 악몽이 된다. 악몽에 점령당한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 ‘nevermore(이젠 끝이야).’[주2]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이 앵글로색슨 혈통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혈통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세상을 향한 증오는 결합되어 극단적인 인종차별적인 사고를 잉태한다. 혼혈인과 이민자들에 대한 그의 경멸은 소설 속에 반영되어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는 이 사실을 놓치기 쉽다. 우엘벡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타난 문제점을 언급하고 비판한다.
러브크래프트는 특이한 사람이다. 인류를 경멸하고,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던 그가 유독 좋아했던 일이 편지 쓰기다. 젊은 작가들은 편지를 통해 러브크래프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초고 교정을 부탁했다. 편지를 받은 러브크래프트는 초고를 진지하게 봐주었으며 답장을 꼭 써서 보내줬다.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작가들은―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작가의 역량을 주목한 몇 안 되는 ‘러브크래프트의 동지들’이다. 러브크래프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작가들을 가리켜 ‘러브크래프트 서클(Lovecraft circle)’이라 한다―러브크래프트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절하고 상냥한 신사’로 기억했다.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는 ‘러브크래프트 평전’이라기보다는 작품 분석에 초점을 맞춘 ‘문학 비평서’에 가깝다.[주3] 그러므로 이 책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아직 안 읽은 독자에게 권할 수 없다. 러브크래프트 입문자를 위한 책이 절대로 아니다. 우엘벡이 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러브크래프트의 골수팬(Lovecraftian)들은 작가의 뛰어난 작품 일곱 편을 ‘그랑 텍스트(grands textes, 뛰어난 걸작)’라고 부른다―의 결말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한 번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는 러브크래프트라는 불가사의한 작가와 ‘그랑 텍스트’에 대한 주석서다. 러브크래프트의 추종자라 자부하는 독자는 우엘벡의 견해에 반박하는 주석을 쓸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우엘벡의 핵심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도전적인 독서를 지향하는 러브크래프트 추종자라면 이 책을 단순히 ‘작가를 향한 팬심을 유발하는 책’ 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제안한다. 소설과 신화로 남은 러브크래프트에 맞서라.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알
[주1] 포는 러브크래프트와 보들레르, 이 두 사람과의 인연이 깊은 작가다. 러브크래프트가 좋아하는 작가는 포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소설을 썼다. 포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 본 보들레르는 포의 단편소설을 불어로 번역했다.
[주2] 포의 시 『까마귀』(The Raven)에 반복되어 나오는 말이다.
[주3] 히가시 마사오(東雅雄)의 《크툴루 신화 대사전》(AK커뮤니케이션, 2019)에 수록된 『다른 차원의 인간-러브크래프트의 생애와 문학』은 러브크래프트의 삶을 좀 더 상세하게 소개된 글이다. 이 글 속에 러브크래프트가 직접 쓴 「개인 프로필」이 있다.
* 37쪽
출간 기념 사인회를 열면 젊은 친구들이 책에 사인을 받으러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롤플레잉 게임[주3]이나 시디롬을 통해 러브크래프트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주3] 롤플레잉 게임(RPG: Role-Playing Game)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비디오, 컴퓨터, 모바일 게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롤플레잉 게임은 원래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 Table-talk Role Playing Game)를 뜻하는 용어다. TRPG는 여러 사람이 탁상에 모여 앉아 각자가 맡은 캐릭터 역할을 연기하는 게임이다. 우엘벡이 언급한 ‘롤플레잉 게임’은 TRPG일 것이다. 크툴루 신화를 소재로 만든 호러 TRPG가 1981년에 출시된 <크툴루의 부름>(Call of Cthulhu)이다. 이 게임은 현재까지 7판이 출시되었고, 국내 TRPG 전문 출판사 초여명이 번역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