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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평점
4점 ★★★★ A-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리듬을 타는 비트 위의 나그네
(래퍼 아웃사이더의 노래 ‘Motivation’ 중에서)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사진 찍는 시간 위의 나그네
(마이브리지에 대한 필자의 단평)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의 모든 다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으로 봐서는 “저게 왜 궁금해할까?”라고 생각한다. 재미있게도 이 궁금증은 19세기 중반 미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쟁점이었다. 이 쟁점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달리는 말의 동작에 관심이 없었다. 화가들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말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력이 좋은 화가도 눈앞에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말들의 경주 장면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고민 끝에 화가들은 그림 보는 관람객들이 수긍하게끔 속임수를 썼다. 그들은 창조를 위해 정확한 묘사를 포기하고 상상력을 선택했다. 그림 속 경마의 앞다리와 뒷다리는 각각 전방과 후방으로 쭉 펼쳐져 있다. 관람객들은 경마들의 질주 장면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그림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경마를 그린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빨리 달리는 순간 말들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회화가 만들어낸 오랜 속임수와 편견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빠르기로 유명한 마차 경마 옥시덴트(Occidente)의 주인이었던 캘리포니아 주지사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하다)는 달리는 말의 모든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영국 출신 사진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를 고용했다. 1872년 봄에 머이브리지는 여러 개의 사진기를 설치해 달리는 말의 순차적인 움직임을 연속 촬영했다. 이 작업을 통해 그간 사람들이 생각했던 달리는 말의 동작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진기의 등장은 화가들의 붓놀림을 무력화시켜버렸다. 사진은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의 진실성 앞에 화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진실성을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림자의 강》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의 실체를 사진에 담기 위해 바쳤던 머이브리지의 삶을 소개한 책이다. 이 책을 한 사진가의 일대기를 정리한 평전으로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책의 저자를 확인하면 분명히 생각이 달라진다. 책을 쓴 사람은 탁월한 분석을 곁들인 글을 쓰기로 유명한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다. 이미 그녀의 글 솜씨를 아는 독자는 《그림자의 강》이 무난한 내용의 평전이라는 단정적인 생각을 접는다.
머이브리지는 찰나의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픈 욕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개인적 욕망이 반영된 사진 작업은 세상을 바꾼 업적이다. 리베카 솔닛은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사진을 찍어온 머이브리지를 변하는 시대를 빠르게 감지한 예술가인 동시에 근대로 향하는 미국의 변화를 주도한 혁신적인 인물로 평가한다. 그동안 머이브리지는 달리는 말의 연속 사진을 찍은 사진가로만 알려졌다. 솔닛은 시대를 앞서간 머이브리지의 또 다른 업적을 주목한다. 그녀는 머이브리지를 ‘움직이는 사진(활동사진)’이 엄청 주목받는 시대를 예감한 선구자로 본다. 머이브리지가 관심을 보인 활동사진(motion picture)은 시간이 흘러 ‘영화’로 발전된다. 솔닛은 “캘리포니아에서 찍은 말 한 마리의 사진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머이브리지는 사진의 영속성과 더불어 연속성도 아울러 추구했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당대 사람들은 그의 사진 작업을 유별난 개인적인 관심사로 이해했다. 머이브리지의 활동사진 연구를 진지하게 주목했던 사람들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영사기를 만든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다. 연구 분야가 비슷한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머이브리지가 살았던 캘리포니아에 영화 산업의 중심지인 할리우드(Hollywood)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말 한 마리의 사진에서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솔닛의 말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머이브리지는 움직이는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 호기심을 가진 사진가였다. 그의 지속적인 탐구와 실험이 없었으면 영화의 탄생을 알린 서막이 훨씬 더 늦게 올랐을지도 모른다.
[Mini 미주알고주알]
1
* 80쪽
머이브리지는 구름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훗날 구름 연구를 위해 15장의 스테레오그래프를 찍었는데, 이는 사진가 동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과학자의 표본 수집이나 화가의 스케치북에 더 가까운 작업이었다.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이 1820년대에 했던 구름 연구,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이 1860년대 『현대 회화』(Modern Painters)[주]에 쓴 구름에 대한 장문의 글을 마이브리지가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주] 《Modern Painters》는 1842년부터 1860년까지 러스킨이 집필한 총 5권의 미술평론서다. 러스킨은 이 책에서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젊은 화가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옛 거장과 구분되는 그들을 ‘현대의 화가들(Modern Painters)’이라고 했다. 윌리엄 터너(J. W. William Turner)는 러스킨이 주목한 ‘현대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번역서에 러스킨의 책 제목이 ‘현대 회화’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한 우리말 제목은 ‘현대(의) 화가들’이다.
2
* 130쪽
요세미티에서는 물과 바위가 머이브리지의 주된 소재였다. 물이 변화와 지나가는 순간을 대변한다면, 바위는 견딞[주]과 지질학적인 무한대를 암시했다. 강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그 안의 강물은 영원히 움직이고,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어떤 것, 종종 시간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영원한 순간을 상징했다. 그의 사진에서 강은 특히 어떤 지속성, 사진 안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알아보는 단위가 된다.
[주] ‘견딤’으로 써야 한다.
3
* 226~227쪽
당시 소설에 등장하는 불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쾌락에 대한 댓가[주1]를 훨씬 가혹하게 치른 것은 플로라였다. 우드헐은 그런 부당함에 항의했고, 그 때문에 동료 페미니스트들에게 축출당하고 영국으로 떠나버림으로써 스스로 댓가[주2]를 치러야 했다. 플로라는 무너졌다. 7월 18일 스물네 살의 그녀는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어떤 설명에 따르면 “뇌졸중에 따른 마비 증세”라고 했고, 다른 곳에서는 “척추 통증 복합증과 류머티즘 염증으로 의사들도 손을 쓸 수 없었다”라고 했다.
[주1, 2] 올바른 표현은 ‘대가’다.
4
* 300~301쪽
머이브리지 때문에 사실주의 화가들은 재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대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정확성은 또 언제나 눈으로 관찰한 모습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대상이나 시간이나 날짜, 계절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모습을 그렸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같은 화가만이 머이브리지의 발견에서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에드가르 드가[주](Edgar De Gas)도 사진을 바탕으로 한 말 그림 여러 장을 남겼다.
고속사진이 보여준 모습과 육안으로 본 모습은 일치하지 않았지만, 카메라가 제시한 증거는 사실주의에 헌신한 사람들로서도 뒤집을 수 없었다.
[주] 본 책 366쪽에는 ‘에드가 드가’라고 되어 있다.